항목 ID | GC08900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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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憲 |
영어공식명칭 | Kim, Sang-Heon |
이칭/별칭 | 숙도(叔度),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채용 |
출생 시기/일시 | 1570년 6월 3일 - 김상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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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김상헌 진사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김상헌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김상헌 문과 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1년 - 김상헌 승정원동부승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김상헌 좌의정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52년 6월 25일 - 김상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61년 - 김상헌 효종대왕 묘정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63년 - 김상헌 봉명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68년 - 김상헌 귤림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00년 - 김상헌 현절사에 추향 |
추모 시기/일시 | 1708년 - 김상헌 서산서원 추향 |
출생지 | 한성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석실마을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
묘소|단소 | 김상헌선생묘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로336번길 11-63[덕소리 산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할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 김생해(金生海), 할머니는 조선 제9대 성종의 손녀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딸 전주 이씨이다. 친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극효(金克孝)이고 친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維吉)의 딸 동래 정씨(東萊 鄭氏)이다. 양아버지는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이다. 부인은 선전관 이의노(李義老)의 딸 성주 이씨(星州 李氏)이다.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김종경(金宗慶)을 낳았으나 일찍 죽어 조카 김광찬(金光燦)을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김상헌은 1570년(선조 3) 6월 3일 외할아버지인 좌의정 정유길(鄭維吉)의 집에서 태어나 3살 때 큰아버지 김대효의 양자가 되었다. 9살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유길 및 형 김상용에게 학문을 배웠다. 16세 때 성주 이씨와 혼인하였고, 이후부터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상촌(桑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등에게서도 수학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2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강원도, 강화도 등지로 피난 생활을 하였다.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부정자가 되어 공식적으로 출사하였다. 30대 이후부터는 예조와 이조좌랑, 홍문관부수찬, 사간원정언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고, 1607년(선조 40) 조카 김광찬을 양자로 들였다. 1608년 겨울 문과 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를 하였고, 1611년(광해군 3) 승정원동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방한 것을 논척한 일로 체직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위시한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사사하였는데, 양자 김광찬이 김제남의 아들 김래(金琜)의 사위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친아버지 김극효를 여의고 안동 풍산으로 내려갔는데, 1621년(광해군 13) 봄 현재의 남양주시 와부읍에 있는 양주 석실로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이후 재야에서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 준 청서(淸西)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의, 대사간 등에 임명되었고, 1625년(인조 3) 홍문관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남인계 인사 목성선(睦性善)과 유석(柳碩) 등을 논척하고 양주의 석실로 돌아왔다.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척화파의 수장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1637년(인조 15) 1월 청나라에 항복하는 문서를 찢고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인조가 항복한 뒤 의주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고,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 뒤 상소하고 양주의 석실로 돌아갔으며, 1646년(인조 24) 좌의정에 올랐다. 1649년 5월 효종 즉위 후 북벌을 추진할 때 척화론자의 수장이자 효종의 스승으로서 대로(大老)로 존숭받았다. 1651년(효종 2) 다시 양주의 석실로 돌아왔고, 1652년(효종 3) 6월 83세에 사망하였다. 8월 선영이 있는 양주 석실[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서 장사 지냈다.
[학문과 저술]
김상헌의 문집으로 『청음집(淸陰集)』이 있다.
[묘소]
김상헌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에 있으며, 김상헌선생묘라는 명칭으로 1987년 2월 12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안동 김씨의 선영(先塋) 안에 할아버지 김생해(金生海)의 묘 아래에 단독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상헌은 1653년(효종 4)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1661년(현종 2) 효종대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63년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1668년(현종 9)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배향되었고, 1700년(숙종 26) 남한산성 현절사(顯節祠)에 추향되었으며, 1708년(숙종 34) 상주(尙州)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추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