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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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龍翼 |
영어공식명칭 | Nam Yong-ik |
이칭/별칭 | 운경(雲卿),호곡(壺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선기 |
출생 시기/일시 | 1628년 - 남용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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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남용익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 남용익 사간원 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남용익 양주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71년 - 남용익 대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87년 - 남용익 대제학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91년 - 남용익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692년 - 남용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5년 - 남용익 문헌(文憲) 시호 추시 |
묘소|단소 | 남용익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로68번길 48[청학리 산27-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의령(宜寧) |
대표 관직 | 대제학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이다. 아버지는 남득붕(南得朋)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이다. 부인은 평강 채씨(平康 蔡氏)이다. 자녀는 4남 2녀로 큰아들은 남정중(南正重)이다.
[활동 사항]
남용익은 1648년(인조 26) 문과에 급제하였다. 1651년(효종 2) 사간원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1655년(효종 6)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657년(효종 8)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였다. 1662년(현종 3)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1666년(현종 7) 사은겸진주부사(謝恩兼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1년(현종 12)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고, 1674년(현종 15)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1687년(숙종 13) 대제학(大提學)이 된 이후 1689년(숙종 15)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반대하였고, 원자가 정호되자 왕의 명령으로 반교문(頒敎文)을 지었으나 문제가 되어 관직이 삭탈되고 도성에서 쫓겨났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영향이었다. 이후 양주의 송산(松山)[현재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돌아갔다. 1691년(숙종 17) 반교문의 문제가 재차 거론되어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692년(숙종 18)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남용익은 주로 서인계 인물들과 교우하였는데 특히 정지화(鄭知和)와 관계가 두터웠다.
[학문과 저술]
남용익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1655년(효종 6)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사행과 견문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부상록(扶桑錄)』을 남겼다. 1680년(숙종 6) 『호곡만필(壺谷漫筆)』을 저술하였다. 1688년(숙종 14)에는 운각활자(芸閣活字)를 사용하여 신라 말부터 조선 현종 대까지의 497가(家)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한 『기아(箕雅)』를 편찬하였다. 남용익의 문집 『호곡집(壺谷集)』은 1695년(숙종 21) 아들 남정중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묘소]
남용익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산27-2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남용익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복구되었다. 1725년(영조 1) 영조가 문헌(文憲)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