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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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裕元 |
영어공식명칭 | Yi Yuwon |
이칭/별칭 | 경춘(景春),귤산(橘山),묵농(默農),충문(忠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혜민 |
출생 시기/일시 | 1814년 8월 12일 - 이유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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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37년 - 이유원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 이유원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 이유원 좌의정 재임 시 수원유수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865년 - 이유원 영중추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73년 - 이유원 영의정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1년 - 이유원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방면 |
몰년 시기/일시 | 1888년 9월 5일 - 이유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88년 11월 7일 - 이유원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음 |
거주|이주지 | 가오별업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
묘소|단소 | 이유원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산96-4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경관(李敬寬)이고, 할아버지는 광주유수 이석규(李錫奎)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계조(李啓朝)이고, 어머니는 박종신(朴宗臣)의 딸 반남 박씨(潘南 朴氏)이다. 부인은 정헌용(鄭憲容)의 딸 동래 정씨(東萊 鄭氏)이며, 아들은 이석영(李石榮)·이수영(李壽榮)이다.
[활동 사항]
이유원은 1814년(순조 14) 8월 12일에 태어났다. 1837년(헌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41년 정시 문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과 규장각대교를 거쳤다.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의주부윤과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철종(哲宗) 연간의 안동 김씨(安東 金氏) 세도정치 시대에 승진을 계속하여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이유원은 1865년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정조 때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보완하는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을 맡았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바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자[후일 순종(純宗)] 책봉 문제로 일본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결탁하였다.
이유원은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인천(仁川)의 개항을 주장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공격을 받고 다시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880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881년 이유원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㰔)의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의 변리공사인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만년에 경기도 양주의 가오곡(嘉梧谷)[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가오별업(嘉梧別業)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으며, 1888년 9월 5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유원의 저술로는 『가오고략(嘉梧藁略)』·『귤산문고(橘山文稿)』와 『임하필기(林下筆記)』 30권 등이 있다. 1867년에는 『경주이씨금석록(慶州李氏金石錄)』도 편찬하였다. 이유원은 다방면에 박학하였고,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나 연경(燕京)에 갔을 때 청나라 조정에서도 이유원의 글씨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묘소]
이유원의 묘는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리 산96-4에 있으며, 부인 동래 정씨와의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