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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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順根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헌주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1909년 2월 - 박순근 의병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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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박순근 출생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활동지 | 박순근 활동지 - 경기도 남양주시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부장 |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개항기 의병장.
[개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순종 황제에게 군대 해산 조칙을 내리도록 압박하여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다. 이러한 해산 조치에 반발한 서울 시위대(侍衛隊)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고, 지방의 여러 진위대(鎭衛隊)도 집단으로 일본군에 항쟁하였다. 시위대와 진위대의 해산 완료 이후에도 일부 병력이 의병으로 전환하여 무장 투쟁을 지속하면서 전국적인 의병 항쟁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동창의군(關東倡義軍)이 결성되었다. 박순근(朴順根)은 관동창의군의 중군장인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에서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박순근은 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상도면(上道面) 지우리(芝尤里)에서 태어나 경기도 남양주 일대를 비롯한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인물로, 관동창의군의 중군장이었던 이은찬 의병부대에서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와 임진강 연합 의병의 실패로 인해 의병 연합은 해산되었다. 이후 의병 연합 부대의 잔류 의병들은 세력 확대를 도모하며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의병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당시 박순근은 이은찬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창의신진소(倡義信陣所) 대장으로 경기도 양주·포천(抱川)·가평(加平)·영평(永平)[현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영북면·이동면·일동면·창수면 일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박순근의 의병 부대는 서울 동소문(東小門) 밖에 있는 화계사(華溪寺)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는데, 우선 화계사를 정탐한 후 화계사 승려 김월명(金越溟)에게 의병 군자금으로 1,000원을 출자하라고 요청한 일이 있다. 이후 1908년 음력 9월에 박순근은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金村面)[현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이패동·삼패동·금곡동·호평동 일대] 조운리(朝雲里) 인근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음력 9월 30일에는 역시 경기도 양주군 미음면(美陰面)[현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지금동·수석동 일대] 인근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음력 1월에도 김석화(金錫華) 이하 18명의 의병들과 같이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外西面) 비금리(秘琴里)[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9년 체포된 뒤 형법대전 제593조 제5호에 의거하여 징역 5년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