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69
한자 李載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9년연표보기 - 이재윤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11년 9월 15일연표보기 - 이재윤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이재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이재윤 출생지 - 경기도 양주목 미음면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우승지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개항기 의병장.

[개설]

이재윤(李載允)[1849~1911]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字)는 성집(聖執), 호(號)는 미석(渼石)이다. 1849년 경기도 양주목 미음면[현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서 태어났다.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한 관료 출신으로, 스승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가르침을 따라 위정척사론을 바탕으로 반일 의식을 키워 나갔다.

일본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을 지속하였고, 1905년 11월에 이르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기도 하였다. 이에 이재윤은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했던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청하였고, 같은 문중 출신이었던 이지용(李址鎔)과 이재극(李載克)이 친일 행보를 보이자 두 사람의 죄상을 비판하고 관계를 단절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이재윤은 현 남양주시 수석동에 해당하는 양주군 미음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양주군·광주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의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저지하기 위해 황제 고종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 평화 회의에 3명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일제는 이를 빌미 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순종을 압박해 대한제국군의 해산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사실상 박탈하였다. 이에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해산 조칙이 내려진 날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해산 군인들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재윤은 정신적 스승이자 의병 운동의 지도자인 최익현의 지시에 따라 1907년에 비밀리에 황해도 풍천군[현 북한 황해남도 과일군]에서 청으로 잠입하였다. 청 잠입 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비롯한 청 관원들과 접촉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설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침략자 세력을 몰아내는 일을 논의하였다. 아울러 만주 지역을 다니면서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에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해버리자 실의에 빠졌고, 결국 1911년 9월 15일[음력 7월 13일]에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재윤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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