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733
한자 李甲同
영어공식명칭 Lee Gapd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10월 24일연표보기 - 이갑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5일 - 이갑동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3·1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이갑동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39년 9월 20일연표보기 - 이갑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이갑동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송촌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활동지 조안리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지도보기
묘소 이갑동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산25-1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3·1운동

[정의]

경기도 남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갑동(李甲同)[1896~1939]은 1896년 10월 24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에서 태어났다. 이갑동의 아버지는 이원섭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의 명의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하는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3월 13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양주군 와부면 송촌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의 경우 1919년 3월 14일 이정성(李正成)·김춘경(金春經)·김현모(金顯模) 등이 와부면 일대를 순회하는 대규모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다. 다음 날인 1919년 3월 15일 이른 아침부터 와부면 송촌리 및 인근 지역의 주민 1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를 벌였고, 면사무소가 있는 와부면 덕소리[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로 행진을 하였다.

이갑동김덕여(金德汝)·정일성(鄭一成)·오성준(吳成俊)·김덕오(金德五)·이정운(李正雲)·김윤경(金允京)·이건흥(李建興) 등과 함께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시위대는 양주군 와부면 조안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 일대를 지나면서 인원이 500여 명으로 늘었다. 덕소리까지 진출하였을 때 일제 헌병들이 시위대를 해산하고 주도자 3명을 체포하자, 이에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일제 헌병들에게 검거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수비대를 상대로 곤봉을 휘두르며 쇄도하여 헌병주재소까지 갔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공포를 발사하였으며 40여 명의 시위대원을 체포하였는데, 이갑동도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갑동은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됨에 따라 옥고를 치렀다.

이갑동은 1939년 9월 20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갑동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산25-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갑동에게 199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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