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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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翕 |
영어공식명칭 | Kim Changheup |
이칭/별칭 | 자익(子益),삼연(三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명섭 |
출생 시기/일시 | 1653년 - 김창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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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김창흡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96년 - 김창흡 유일로 서연관에 초선 |
활동 시기/일시 | 1721년 - 김창흡 사헌부집의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722년 - 김창흡 사망 |
출생지 | 명례방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
거주|이주지 | 양주 석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 |
묘소|단소 | 김창흡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2-24 |
사당|배향지 | 석실서원 터 -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경력 | 사헌부집의 |
[정의]
경기도 남양주에 거주하고 석실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문신.
[가계]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고,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김광찬(金光燦)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 안정 나씨(安定 羅氏)이다. 부인은 이세장(李世長)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형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이고, 동생은 김창업(金昌業)·김창집(金昌緝)·김창립(金昌立)이다.
[활동 사항]
김창흡은 1653년(효종 4) 한성부 명례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김시양(金時讓)과 이단상(李端相)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671년(현종 12) 형 김창협과 함께 금강산 등을 유람하였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명으로 응시하였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북악산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지어 동료들과 글을 읽고 산수를 즐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영평(永平)[현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김창흡은 1696년(숙종 22) 유일(遺逸)로 서연관에 초선되었으며, 양주(楊州) 석실(石室)의 송백당(松栢堂)에 머물면서, 형 김창협과 함께 강학하였다. 송백당은 김상헌의 옛 집터로, 송백당유허비(松栢堂遺墟碑)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에 있다. 김창흡은 1721년(경종 1)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영조(英祖)가 세제로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신임사화로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점차 악화되었고, 1722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창흡의 저술로는 『삼연집(三淵集)』·『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전한다. 김창흡은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기설(理氣說)과 관련하여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경향을 보였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이이의 견해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여긴 형 김창협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한편,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관련하여서는 이(理)를 쌍관(雙關)으로 파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였고, 표리(表裏)로 나눠 일관(一關)으로 여긴 이이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김창흡은 둘째 형 김창협과 함께 ‘농연(農淵)’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숙종 대에 농연 형제는 근기 노론의 정치 이념을 정립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들은 실용·박학의 학문적 기반 위에 정치 이념으로 송시열의 의리론을 세워, 남인과 소론과의 정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농연 형제의 계열을 잇는 이들은 노론의 핵심으로 자처하며 영향력을 지속해 나갔다.
[묘소]
김창흡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산2-24에 있다. 묘역은 1994년 이후에 대대적인 정비가 시행된 것으로 보이며, 봉분에 호석이 둘러져 있다.
[상훈과 추모]
김창흡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석실서원(石室書院)·미원서원(迷源書院)·신계사(新溪祠)·충곡사(忠谷祠) 등에 제향되었다. 이 중 석실서원은 남양주시 지금동에 있었는데, 1656년(효종 7) 김상용과 김상헌의 충절과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김창흡은 1857년(철종 8) 추가 배향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으며,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다. 현재 조말생의 묘역 입구에는 과거 석실서원 터였음을 알려주는 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