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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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腦蔘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
집필자 | 이한길 |
장뇌마을 -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 |
박걸남 묘역 - 강원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 |
박걸남로 - 강원 삼척시 노곡면 |
[정의]
강원도 삼척시의 특산물인 장뇌삼을 재배하는 마을.
[개설]
여삼리(閭三里)는 조선광해군 때 미로면에서 밀양 박씨, 영조 때 김원이(金源伊), 그 후 안씨, 서씨 등이 이주 정착하였다. 입시터에는 삼척 김씨가 먼저 들어왔으나 영일 정씨가 배판을 했다. 큰말은 순흥 안씨가 먼저 들어왔다. 호구 수는 1759년 20호 95명, 1916년 75호 428명, 1962년 65호 474명, 1982년 66호 397명, 1993년 50호 198명, 2017년 49가구 89명이다. 오늘날에는 삼척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노곡면 동북 끝에 위치한 여삼리는 동쪽으로 조비리, 서쪽은 상천기리, 남쪽은 상반천리, 북쪽은 미로면 및 삼척시에 서로 이웃하며 사방 각각 6㎞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여삼(內閭三), 거리여삼[間閭三], 소학골[小鶴谷, 巢鶴谷], 입시터[入時基, 入始基], 창밭골[蒼田谷], 사항이(士項伊)의 6개 자연마을을 합쳤다. 마을 동쪽에는 창전산(蒼田山)과 여심령(汝深嶺), 남쪽에는 유전산(杻田山)이 있고, 서쪽으로 삿갓봉[笠峰], 북쪽으로 대고등산(大鼓嶝山)이 있다.
[여삼리의 지명 유래]
여삼리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1984년 편찬된 『삼척군지』를 보면 ‘여심이, 여심, 넷심이’라 불렸다. 여기에서 ‘넷심’이란 이름은 웅덩이처럼 소형분지가 4곳이 있으므로 ‘넷심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 여심(汝深)이 되었다가 후에 여삼(閭三)으로 표기한 것처럼 해석했다. 다른 유래는 2000년 김진순이 조사한 노곡면민속지 『가린재비 진재비 막아 천섬만섬 점제하소』에 소개되어 있는데 예전에 지형이 깊다고 하여 여심이라 하다가 나중에 큰말, 샛말, 입시터 등 세거리, 세 마을이 있다 하여 여삼이라 했다는 설명이다.
[여삼리의 생활 문화]
『가린재비 진재비 막아 천섬만섬 점제하소』는 2000년경 답사한 자료로 적어놓았기에 비교적 최근의 여삼리의 상황을 누군가[제보자] 발화했고 그것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보자가 과거의 여삼리 역사를 정확히 알고 제보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현재의 여삼리 상황에 충실하게 제보를 한 자료로 보인다. 과거에는 네 개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세 개의 마을로 줄어들었을 개연성이 크다. 『가린재비 진재비 막아 천섬만섬 점제하소』보다 『삼척군지』의 기록을 신빙할 수밖에 없으나, 『삼척군지』의 기록을 믿기에도 약간은 의문이 생긴다. 여심이가 여삼으로 되었다는 것은 발음이 부정확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강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개의 설을 모두 기록하였다.
마을은 큰목비이, 횃골, 소부골, 건산, 뒷가산, 목이, 성구네미[성구산], 여삼재[조비리 넘어가는 재], 작은골, 큰골[화전 일구어 먹던 골], 창밭재, 우골[근덕장터 다니던 길] 등의 지명이 있다. 입시터는 삼척에서 들어올 때 여삼리 초입이 되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입시터에서 삼척까지는 20리 길이다.
1974년~1975년경 마을에 도로가 생겼는데 마을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술을 담가 마시며 일손을 보탰다. 조비리에서 여심령을 넘어 여삼리까지의 자동차 교통로는 1976년에 삼척공업전문학교의 지원을 받아 개통되어 일명 제무시[GM]라 불리는 차가 처음으로 올라왔다. 도로는 상반천리와 조비리로 통한다. 노곡에서 올라오는 길은 199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
전기는 1977년 1월 15일에 들어왔다. 이 무렵 TV도 들어왔다. 수도는 1990년대 중반쯤에 들어왔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는 빨래를 하려면 창밭골, 쐐골까지 나가서 해야 했다.
노곡국교 여삼분교는 1965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1982년경에 84명이 재학하였으나 그동안 급격히 줄어 1993년에는 1학급에 남녀 2명이 다니고 있었다. 1995년에 폐교했다.
오늘날 여삼리의 주요 생업은 장뇌농사이다. 그 외 더덕과 도라지와 두릅을 많이 재배한다. 감자나 보리 등은 집에서 일용할 양식 수준으로 농사를 지으며, 고추와 마늘도 재배한다.
장뇌농사를 짓기 전에는 화전을 했었다. 당시 비료도 없었고 토질이 척박하여 화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을 주위 대부분의 산들이 화전을 하던 산들이었다. 화전농사는 서속, 강냉이, 콩, 감자, 메밀 등을 많이 했다. 그 당시 봄철 보릿고개를 겪을 무렵에는 곡식이 모자라 나물을 뜯어 연명을 했다고 한다. 이 무렵 나무장사도 했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인근 정라진에서 팔았다. 또 1910년 이전에 기와공장이 있었다.
마을에는 물이 귀해서 논이 없어 제사를 지낼 때도 메밥만 쌀로 짓는다. 사람들은 보리밥 위에 쌀밥 서너 숟가락 얹은 뚜껑밥을 먹었다. 주식은 감자, 보리, 서속 등이었고, 먹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1~1.5㎞ 정도 떨어진 막거리 회관 부근에서 물지게로 지어다가 마셨다. 날이 어두워지면 솔가지에 불을 붙여 환하게 한 다음 물을 길으러 다녔는데, 몸을 씻을 때는 비누칠도 하지 못했다. 비누칠을 하면 그 물을 소가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삼리에 시집을 가면 물 길러 다니느라 고생한다는 소문이 관내에 나 여삼리 총각들은 장가도 잘 가지 못했다. 여삼리는 장마로 인한 피해가 없고 나무가 많아서 수해도 잘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우물에 고사를 지냈다. 서낭당에서 먼저 지낸 후에 우물에 메를 지어 놓고 물이 잘 나게 해달라고 빌어 메밥을 한 숟가락 우물에 퍼 넣었다.
산림·휴양자원과 녹색체험이 어우러진 산촌생태마을은 총 사업비 15억 원으로 2010년에 착공하여 2012년에 완공되었다. 산촌생태마을에는 장뇌삼 재배단지 및 고사리 재배단지를 비롯해 임산물가공센터, 저온저장고, 장뇌체험관, 장뇌삼 묘포장, 돌리네 관망대, 약수터, 장뇌삼 조형물 등의 생산소득 기반시설과 녹색체험시설을 설치해놓았다.
볼거리로 옷바우[衣巖]가 있다. 옷바우는 장군바위처럼 생겼으며, 밑에 늪이 있었다. 이 바위와 관련 있는 박걸남 의병장의 묘역이 관내에 있다. 박걸남 장군에 관한 기록은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나 1916년 심의승이 엮은 『삼척군지(三陟郡誌)』에도 나와 있지 않다. 박걸남 장군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76년(崇禎起源後五丙子) 박걸남 장군의 9대손이 발간한 『임진왜란 의병장 박걸남유사록(朴杰男遺事錄)』이다.[이 책은 1982년 4월에 재출간되었다.] 박걸남 장군의 설화적 형상화가 처음 시도된 것은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 2-3 [강원도 삼척군 편]이었다. 이 설화는 1980년 11월 17일 채록되었는데, 제보자는 박재문(남, 59)이었다. 박재문은 향토사학자였고, 고교 교장이었다. 가장 주요한 것은 밀성 박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1981년 4월 17일 문공부의 국비 2000만 원 지원으로 박걸남 장군 유적정화사업을 준공했다. 또 『박걸남 유사록』을 1982년 4월에 재발간했다. 공공기관인 삼척군에서 편찬한 공공서적에 박걸남 장군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83년 편찬한 『실직의 향기』였다. 박걸남 장군의 흔적 찾기는 밀양 박씨 문중에서 1990년대 들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 결과 1995년 박걸남 장군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전해지는 『선무원종공신녹권』을 찾아내었다. 이 무렵 삼척시립박물관에 학예사로 근무했던 김태수 박사는 『삼척설화집』을 편찬하면서 박걸남 장군에 대한 세간의 설화들을 수집해 수록했다. 녹권이 등장한 이후 문중에서는 다시 선양사업에 매진하여 1996년 국비 1억 2000만 원을 지원받아 묘역 일대의 보수공사를 다시 하였으며 2000년 3월 11일에는 강원도 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받았다. 또 강원도에서는 2003년 8월 강원의 인물로 선정하였고, 삼척시에서는 2010년경 오분리 앞 도로를 ‘박걸남로’로 명명하였다.
[장뇌마을]
여삼리는 삼척군의 특산물인 장뇌삼을 재배하는 장뇌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척에서 장뇌삼을 주로 재배하는 곳은 여삼리와 둔달리이다. 장뇌는 3대 정도 윗대의 어른이 씨를 가져와서 심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우밭에 사는 심광철이라는 노인이 산에서 산삼 다섯 뿌리를 캐어 오자 이 마을에 살던 친구가 씨 다섯 개를 얻어서 심었고, 그중에서 세 개가 살아 번식한 것이 장뇌 재배의 시작이었다. 장뇌 씨를 처음으로 받아 온 사람은 정성용 씨이며, 약 200년 전쯤의 일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장뇌삼 농사의 역사는 약 200년 정도로 파악된다.
장뇌는 씨를 받아서 뿌려 놓고 최소한 10년 정도 지나야 캘 수 있다. 씨를 심을 때 기록을 해 두기도 하지만 보통은 주인들이 다 알고 있다. 처음에 한 홉[500알] 정도 심으면 100개 정도가 올라온다. 두더지가 파먹고 가물어서 생각만큼 많은 장뇌삼이 올라오지는 않는다. 한번 씨를 뿌리면 10년이 지나서야 수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소득을 얻기까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장뇌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76년 무렵 여삼리 장뇌삼이 방송이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제값을 받고 팔기 시작했다. 마을이 장뇌 때문에 비교적 부유하게 살고 있다. 장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아이들 대학도 보내는데, 다른 마을과 비교해보면 비교적 부촌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아프거나 눈병이 나면 ‘삼 잡자’ 해서 삼을 잡았는데, 할아버지들은 삼잎파리를 찧어서 눈에 넣어주었다. 삼은 눈에도 효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간경화증에도 좋다고 한다.
장뇌는 토지도 중요하고 배수도 잘 되어야 한다. 더구나 삼이든 인삼이든 장뇌이든 간에 물만 고이면 100% 썩기 때문에 배수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여삼리의 토질은 물이 없는 척박한 땅이라 장뇌삼 재배에는 최적격지가 된다. 장뇌삼은 마늘 밭 부근에서 키울 수 없고, 농약을 치면 삼잎이 말라 버린다. 장뇌는 산에 심으면 자라지 않지만 집 부근에 심으면 요두가 거의 없어지면서 크게 자란다. 장뇌는 비료나 퇴비를 주지 않는다. 장뇌밭의 반은 응달이어야 하고 반은 양달이어야 하며, 햇빛이 적당히 들어야 한다. 위에 솔감(소나무 가지)을 덮어 주는데, 장뇌는 침엽수를 싫어한다고 하여 참나무 가지 잎을 끊어서 덮어 주기도 한다. 검은 비닐로 덮기도 하지만 여삼리에서는 공해 때문에 하지 않는다.
장뇌농사를 지을 때 금기가 있다. 옛날 어른들이 말하길, 여자들이 장뇌삼밭에 가면 농사가 안 된다고 하였다. 여자들이 가면 재수가 없다고 한 것은 가위질을 하기 때문에 물건을 잘라 먹는다는 유감주술에서 비롯한 속신이다. 개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금기도 있다.
장뇌삼 위에 가느다랗게 피는 것을 뇌두라고 하는데, 뇌두가 인삼과 구분할 정도가 되고 밑이 두들두들한 것이 좋은 장뇌삼이다. 장뇌삼은 나이가 많을수록 좋다.
여삼리에서는 장뇌삼 씨를 한 홉에 20만 원 정도에 판매하고 있다. 한 홉은 맥주컵으로 한 컵 분량이다. 씨의 크기는 팥알 정도 된다.
장뇌주는 인삼주와 비슷한 맛을 내지만 장뇌에서 단맛이 나기 때문에 끝맛이 달콤하다. 몸에 열이 있는 사람이 장뇌를 먹으면 안 좋다. 장뇌주는 팔 수 없는 장뇌, 즉 벌레가 먹거나 캘 때 상처가 난 장뇌로 담근다. 이런 장뇌삼은 값을 조금 깎아서 매매하면 되지만, 가격이 낮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술을 담근다고 하여 장뇌주를 담가 놓는다. 장뇌주는 노랗게 우러나면 매우 독해서 먹기에 힘들다. 장뇌는 술만 넣고 장뇌주를 담근다. 공기가 안 통하도록 관리만 잘하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겨울철에는 땅이 얼어서 캐어놓은 뿌리를 팔기도 한다. 뿌리를 캘 적에 너무 쉽게 쑥 빠지는 것은 가짜로 심은 것이다. 여삼에 49호 정도가 살고 있으며, 대부분의 집들이 분량의 차이는 있으나 장뇌삼을 재배하고 있다. 오늘날 장뇌삼이 정확한 수령 판별과 재배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하여 여삼장뇌작목반이 구성되어 있고, 장뇌삼의 판매 시기는 주로 8월에서 12월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