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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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 |
이칭/별칭 | 산맥이,산메기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집필자 | 이한길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행하는 가정의 액을 없애고 복을 초대하기[제액초복] 위하여 산을 먹이는 풍속.
[개설]
산멕이는 산을 먹이는 풍속이다. 이 풍속의 유래는 상당히 오래 전으로 소급된다. 사실 산을 먹이는 풍속은 삼척 지역뿐만 아니라 영동 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풍속이다.
『추강선생문집』에 ‘영동민속(嶺東民俗) 매년삼사오월중(每年三四五月中) 택일영무이제산신(擇日迎巫而祭山神) 부자태재(富者駄載) 빈자부대(貧者負戴) 진어귀석(陳於鬼席) 취생고슬(吹笙鼓瑟) 연삼일(連三日)…’이라 하였다. 추강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매년 늦봄~초여름에 강릉 지역에서 산신제(山神祭)가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을 살펴보면 오늘날 삼척 지역 산멕이 풍속과 상당히 흡사하다. 3~5월 중으로 날을 받는 것, 무당을 앞세우고 산신에게 제향(祭享)하는 것,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모두 제물을 해서 귀석에 진설(陳設)하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 등은 상기 언급과 삼척의 산멕이의 풍속이 대단히 흡사하다. 물론 날짜에서 상기 언급은 사흘이지만 오늘날 삼척 산멕이는 하루에 마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멕이 풍속도 야밤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이틀에 걸쳐 연행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틀이나 사흘이나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효온이 기록한 상기 제의(祭儀)의 양상이 산멕이 원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오늘날 삼척 지역에서 산멕이는 산신, 군웅신, 용신, 삼신 등을 제향하는 제의로 알려져 있다.
[산멕이 명칭]
‘산멕이’ 용어를 두고 학자들 간 이견이 있었다. 장주근은 산멕이기, 장정룡은 산멕이로 초창기에 규정하였다가 훗날 다시 산맥이로 옮겨갔다. 황루시·김진순·장장식 등은 산메기라 했으며, 이창식은 산멕이라 했다. 김태수와 이한길 등은 산멕이로 사용하고 있다.
산멕이는 산을 먹인다, 산맥이는 산을 막는다는 뜻이다. 골막이 서낭이 골을 지키는 개념이라면 산을 지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산맥이이다. 황루시 등은 산멕이를 발음 나는 대로 써서 산메기로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 뜻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삼척 산멕이의 특징을 보면 산에 올라 앞에서 언급한 제신들을 먹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산을 먹여야 벽사초복(辟邪招福)을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에 따라서 산멕이라는 용어가 삼척 산멕이 풍속을 온전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내미로리의 산멕이]
집단으로 산멕이가 잘 전승되고 있는 마을은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고천마을이다. 고천마을은 아직도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산멕이를 행하고 있다. 2005년 봄철 산멕이 날을 잡은 사람은 최진극 씨이다. 최진극 씨는 2001년 문화관광부가 후원한 소규모 지역 축제 내미로리 산멕이 행사의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날을 잡은 사람을 당주라 부른다. 당주는 정해진 날을 마을 사람들에게 통보하고 함께 갈 사람들을 확인한다. 이렇게 하여 2005년 봄철 산멕이에 갈 집들로 17집이 확정되었다. 이날 이한길을 비롯하여 김태수 등 여러 명이 참관하고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이 글은 김태수가 기록한 글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하였다.
산멕이에 복자 1명과 무녀 2명이 참여했다. 독경의례는 김동철이 전담했고, 무녀는 천순자와 강행자 등이 맡았다. 이들 무속인은 하루 전날 날을 받은 당주 집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오전 2~3시경 당주 집 조상들께 간단히 상을 차려서 산멕이 가자는 축원을 한 다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쉰움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속인 없이 당주 부부가 오전 2시경에 간단히 상을 차리고 조상님들께 놀러 가자고 고하였다. 이때 제상에 올리는 메는 산멕이에 모시는 조상 수대로 올린다고 한다. 보통 기제사의 대상이 산멕이에 모셔진다. 최진극 씨는 조상이 네 분이라 4그릇을 준비하고, 삼신메 한 그릇을 따로 준비했다. 조상메 4그릇은 놋그릇에 담고, 삼신메는 신선로에 담았다. 제물을 2개의 배낭 속에 담고 떠날 준비를 끝냈을 때가 새벽 4시였다. 10분 후 복자와 무녀들이 최진극 씨 집으로 들어오고, 4시 30분경 천은사 뒤편의 오솔길을 통하여 쉰음산으로 올라갔다.
5시 10분경 천은사 뒤편 초입에서 포, 시루떡, 과일 등 제물을 놓고 부정경을 복자가 읽으면서 부정굿을 시작하였다. 막 먼동이 트려 할 무렵이었다. 다시 출발하여 산의 중턱쯤 가서 산꼭대기의 원당(願堂)으로 갈 집들과 중턱의 은선암에 남을 사람들로 일행이 나뉘어졌다. 원래는 모두가 원당으로 가야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은선암에 남았다.
7시 10분경 쉰움산 정상의 원당에 도착하여 조상당에 제물을 진설하였다. 조상당은 1m 정도 높이에 제단으로 사용하기에 알맞은 평편한 돌들이 길게 옆으로 죽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이런 것을 남효온이 말한 귀석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해 보였다. 당주가 가운데 진설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좌우로 포진하여 진설을 마친다. 제물은 집집마다 다르다. 보통 귤, 사과, 배, 곶감, 대추, 바나나, 과자, 시루떡, 동돌개비떡, 어물, 대구포, 두부, 찰떡, 콩나물 등 저마다 형편대로 차려 왔다. 진설을 마치면 복자가 다시 부정경을 읽었다.
8시 10분경 산맞이가 시작되었다. 당주는 유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산신메에 수저를 꽂고, 술 한 잔을 붓고 나서 삼배를 올렸다. 다른 집의 대주들도 동일하게 행동했다. 산맞이가 끝나고 아침을 먹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국수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무녀들이 김밥을 마련하였다. 이때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복자와 무녀들은 각 가정의 조상과 가족들의 생년월일을 적는 작업을 하였다.
9시 20분경 먼산맞이를 하였다. 먼산맞이는 하고 싶은 집만 한다. 김시영 씨 집안 어른이 태백산에서 치성을 드렸기에 먼산맞이를 하였으며, 강행자 무녀가 진행하였다.
10시경 조상맞이가 시작되었다. 복자와 2명의 무녀가 각 집의 조상당을 돌면서 축원해 주었다. 소지가 잘 올라가면 한 해의 풍년이 담보되기 때문에 소지가 잘 올라가라고 저마다 축원했다. 조상맞이가 끝나고 곧장 점심을 먹었다. 이때 일부는 삼신당으로 이동하였다. 삼신당은 조상당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돌산이었다. 여기에는 삼신메, 실 한 타래, 한지 한 장을 갖고 간다. 정해진 바윗돌에다 한지와 실을 걸고 난 후 메를 올리고 치성을 드리면 무녀가 옮겨 다니면서 대를 내려준다. 무녀가 삼신경을 구술하면 대내림을 받은 사람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삼신메가 저절로 흔들리기를 요란스럽게 한다. 아무리 요란스러워도 삼신메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낮 12시 45분께 용신제가 시작되었다. 삼신당 옆에 있는 우물처럼 형성된 작은 연못이 용신당이다. 용신당에서 절을 하고 생쌀을 용신당에 뿌리면서 풍년을 기원했다.
12시 50분경 다시 조상당으로 이동하여 군웅축원(軍雄祝願)을 올렸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 특히 소가 무병장수하기를 축원하였다. 이어서 조상 길 갈라 주기를 하였다. 준비해 온 삼베 조각을 펴서 길게 늘어뜨리고 좌우로 자르면서 축원한 후 그 천을 조상당 앞의 소나무 가지에다 걸어 두는 것이다. 이로써 산멕이 공식 행사는 끝나고 뒷전 멕이기를 진행했다. 뒷전 멕이기는 객귀를 물리는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주민들은 쉰움산의 너래반석 한 곳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너와마을의 산멕이]
신리의 산멕이는 본래 대규모 행사였지만 오늘날에는 집안끼리[예 : 김해김씨, 경주김씨 등] 한 날[주로 사월 초파일]을 잡아서 하는 정도다. 현재 신리는 경주김씨, 삼척김씨만 시행한다고 한다. 산멕이 음식도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다. 보통 떡은 백설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예전의 2, 3반은 동산목이에서 산멕이를 하고 5반은 경주 김씨가 산당골[육백산 주변]에서 주로 산멕이를 하였다.
산멕이는 문자 그대로 산에 무엇인가를 먹이는 신앙이다. 즉 산을 대접하는 의례이다. 산멕이 터는 마을마다, 집안마다 정해진 산이 있지만 주로 태백산 줄기의 산으로 올라간다. 산멕이 터가 마을 뒷산인 경우도 있지만 멀리 두타산, 태백산까지 굳이 찾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다. 산멕이는 삼월 삼짇날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등 주로 봄에 하지만 가을에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산멕이를 ‘조상 화전놀이 시키는 놀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무당이나 경을 읽는 복자 등 무속인을 데리고 가서 조상을 대접하고 자손들의 발복을 빈다. 산멕이를 갈 때에는 보통 한 집안의 여러 가족이나 한 마을에 사는 서너 집이 모여서 단체로 간다. 지역에 따라 여자만 가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가기도 하지만 딸은 데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 대신 집안을 이어 갈 며느리를 데리고 간다고 한다.
산멕이를 갈 때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고, 산에 가서 직접 메를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때 메는 산신메와 조상메 두 그릇이라고 한다. 산멕이 터는 대개 마을 단위로 지정된 장소가 있으며, 중요한 것은 나무이다. 집안마다 정해진 나무가 있어 그 나무 앞에 상을 차린다고 한다. 그러고는 나무 밑동에 한지나 베조각, 실 등을 폐백으로 건다. 무당이나 복자는 그 앞에서 징을 치며 산신, 제서, 삼신 등을 축원한 뒤 베 조각을 들고 춤추면서 칼로 찢어 길게 갈라 나간다고 한다. 이는 조상의 길을 갈라 주는 의미가 있다고 믿고 나무에 걸어 놓는다고 한다. 또 소를 위하여 축원하고 소지를 올린다고 한다.
이러한 산멕이는 소와 연관이 깊다고 한다. 산멕이를 다니는 집에서는 평소 집안에 ‘산’이라는 신체를 모신다고 한다. ‘산’은 베 조각이나 한지 또는 왼새끼를 꼰 것으로, 예로 부엌에 있는 소 여물통 위의 기둥에 모셨다고 한다. 소는 ‘산’에 메인다고 하여 소가 아프거나 새끼를 낳을 때면 으레 산 앞에 가서 물이라도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멕이를 다녀온 후 ‘산’은 새것으로 갈게 된다고 하였다.
산멕이의 기원이나 목적은 상당히 복잡해서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먼저 기원을 보면 ‘산’이란 이 지역에서 호랑이를 가리키기 때문에 호환을 막기 위한 신앙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 예국에서는 호랑이를 제사 지낸다고 되어 있어 남다른 신앙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다른 지역에서 비린 것을 먹을 때마다 산에 거는 행위 역시 호랑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소가 산에 메여 있다는 말도 호랑이가 물어 가는 것을 막으려는 데서 나왔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산멕이는 조상 대접과 자손 발복을 기원하려는 신앙이 대부분이다. 소 역시 민간 신앙에서 조상으로 모시기 때문에 비롯된 공산이 크다. 이에 따라서 산신, 삼신, 조상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
[민속 예술로서의 삼척 산멕이]
삼척시에서는 산멕이를 민속 예술화하여 1995년과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였다. 김진순이 지도한 가운데 1997년에 80명, 1999년에 120명이 각각 출연하였다. 「삼척 산멕이」는 산멕이 터에 오름, 부정치기, 먼산맞이, 삼신할미맞이, 군웅맞이, 조상맞이, 쇠[우(牛)]신맞이, 뒷풀이[칭칭이소리]로 구성되었다.
「삼척 산멕이」를 만들기 위하여 현지 조사가 선행되었다. 현지 조사에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교곡리불기산 산멕이 터는 가파른 곳이었음에도 산멕이 터로 영험이 있었다. 옛날엔 엿장수가 이곳으로 엿을 팔러 오기도 하였다. 집 안에서 ‘산’은 마구간 주변에 모셨다. 삼베를 짜면 첫 수지(樹脂)를 베어 내어 마구간에 걸었다. 지금은 한지로 대신한다. 소가 병이 나면 마구간에 모신 한지 앞에서 치병을 기원하였다. 칭칭이소리는 모여 놀다가 헤어질 무렵에 잘 놀다 간다는 의미로 지덕이나 밟아 주자고 하여 쇠를 두들기며 불렀다고 한다.
「삼척 산멕이」는 1998년에는 도대회에서 우승하여 전국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김태수는 2001년 문화관광부에서 추진한 지역 문화의 해, 지역 사회 소규모 특성화 프로그램 대상으로 산멕이를 신청하였다. 이것이 선정되면서 국비 지원 사업으로 천제와 함께 산멕이를 재연하고, 산멕이보존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