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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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山城 |
영어공식명칭 | Sancheoksan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시대 삼척 지역의 본성인 삼척산성.
[개설]
고려시대 삼척 지역에도 군사 전략상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정종대인 947년에 성을 쌓았다. 삼척산성은 당시 삼척 지역의 본성으로 군사 목적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주민 거주 등을 위하여 쌓았다. 그러나 삼척의 본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어서 튼튼한 성이 아니었다.
[양계 주진군의 방어 전술과 성(城)]
고려시대 양계(兩界) 주진군(州鎭軍)의 외적 침입에 대한 방어 전술은 주진(州鎭)의 본성(本城) 중심으로 행하여진 지구전, 즉 견벽고수(堅壁固守)였다. 견벽고수는 성 안에서 적과 대치하여 지구전을 펼침으로써 적의 예봉을 피하는 한편 군량 수송 등의 어려움으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술이었다. 이 견벽고수를 좀 더 효과 높게 수행하기 위하여 이따금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적을 공격하기도 하였고, 청야전술(淸野戰術)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청야전술은 주변에 사용할 만한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모두 없앰으로써 적을 지치게 하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취한다.
견벽고수 전술을 효과 높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성이 필요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양계의 주진에 성을 쌓았다. 사료에서 제주진(諸州鎭)을 제성(諸城)이라 하고 주진의 명칭을 모성(某城)이라 한 것도 주진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양계 주진의 성들은 산성이 아니었다. 비록 그 주위에 산성이 있기는 하였지만 진성(鎭城) 자체는 조선시대의 읍성(邑城)과 비슷하였다. 즉 방어와 거주라는 두 가지 목적을 고려하여 낮은 산과 평지를 함께 연결하여 쌓은 성이었다.
[삼척산성]
고려시대 삼척 지역에도 군사상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성이 축조되었다. 삼척에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947년(정종 2)에 성을 쌓았다. 이때 쌓은 삼척산성(三陟山城)은 당시 삼척군의 본성(本城)으로, 군사 목적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 주민 거주 등을 위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척의 본성은 흙으로 이루어진 토성(土城)이어서 그다지 튼튼한 성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13세기 몽골이 침략하였을 때 당시 무인정권 집권자인 최항(崔沆)[?~1257]은 삼척산성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하여 옮기려 하였다. 비록 삼척산성이라 하였지만 성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삼척현의 본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항의 삼척산성 이전 계획에 대하여 당시 삼척현 주민들은 뇌물을 써서 이전을 막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삼척산성 이전을 달가워하지 않은 고을 주민들은 최항이 총애하는 유경(柳璥)[1211~1289]에게 은병(銀甁) 30개를 바치며 산성 이전을 막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유경은 삼척현 주민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주민들은 역시 최항이 총애하는 유천우(兪千遇)[1209~1276]에게 다시 부탁하였다. 이때 유천우는 뇌물을 받고 최항에게 말하여 삼척산성을 옮기지 않도록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