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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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浦鎭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po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 말과 조선시대 때 삼척 지역에 설치한 수군 기지.
[개설]
삼척포진은 고려 말인 1384년에 설치되었다. 지휘관으로는 만호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만호를 폐지하고 대신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당시 진관 체제 아래에서 삼척포진의 수군첨절제사는 삼척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안인, 고성, 울진, 월송 등 4개 포진의 만호를 통솔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척포진은 고려 말인 1384년(우왕 10)에 처음으로 만호(萬戶)를 둘 때 함께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빈번한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공민왕 말년부터 수군 재건과 강화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삼척 지역 군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삼척포진을 설치하고 만호를 둔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허목(許穆)[595~1682]의 『척주지』를 비롯한 삼척 지방 읍지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삼척포진과 그 지휘관인 만호 및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치]
삼척포진은 처음부터 삼척부(三陟府) 관아 동쪽 8리(里) 지점에 있었다. 지금의 육향산(六香山)을 남단으로 하는 그 북쪽 지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호 및 수군첨절제사]
삼척포진이 설치된 후 수군 지휘관은 만호였다. 고려시대 삼척포진 만호는 삼척군의 지군사(知郡事)가 겸임하였다. 삼척포진 만호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존속하였지만 여전히 삼척도호부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겸하였다. 그러나 1419년(세종 1) 8월에 강원 감사의 건의로 도호부사가 겸임하던 만호를 폐지하고 수군 전임 지휘관인 수군첨절제사를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1462년(세조 8) 9월에 병조에서 삼척포는 요충지인데 부사가 수군과 육군을 겸해서 다스려야 하니 사변이 일어나면 대처하기 어렵다며 만호를 둘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폐지된 연곡포(連谷浦) 만호 황기강이 삼척포 만호로 옮겨 왔다. 그 후 진관(鎭管)체제가 완성된 후인 1468년(세조 14)에 다시 만호를 폐지하고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
당시 진관체제 아래에서 삼척포진의 수군첨절제사는 삼척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안인, 고성, 울진, 월송 등 4개 포진(浦鎭)의 만호를 통솔하였다. 그 후 삼척포진 첨절제사는 1672년(현종 13)에 영동 지역을 관장하는 영장(營將)을 겸임하였고, 1673년(현종 14)에는 영동 지역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수군 및 병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삼척의 강군(舡軍)이 21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종실록』에 따르면 1477년(성종 8) 당시 삼척포의 부방선군(赴防船軍)은 90여 명이었다. 그 후 1626년(인조 4)에는 수병(水兵)이 54명이었다. 여기에 기병(騎兵) 138명 가운데 48명이 삼척포로 옮겨 첨방(添防)하였다. 1656년(효종 7) 당시의 삼척포 수군 수는 인조대와 같았다.
이러한 수군을 처음에는 3령(領)으로 나누고 각각 4정(丁)을 1호(戶)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수군이 많이 도망하여 2정으로 1호를 조직하고 6번(番)으로 하여 3령을 만들었다. 한편 삼척포진의 병선은 4척이었다. 모두 작은 배, 즉 소맹선(小猛船)이었다. 병선 한 척에 배정된 수군은 38명이었다.
[삼척포진성]
원래 포진에는 성보(城堡)를 설치할 수 없었다. 그러나 1484년(성종 15)에 허용되어 이후 각 포진에 성보가 연차로 설치되어 갔다. 이에 따라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도 1489년(성종 20)경부터 축성이 시작되어 거의 31년이 지난 1520년(중종 15)에 완공되었다. 이때 건립된 삼척포진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900척(약 273m)이고, 높이가 8척(약 242㎝)이었다. 이 삼척포진성의 동문이 진동루(鎭東樓)이다. 진동루는 성곽이 완공되기 이전인 1511년(중종 6)에 건립되었다.
[변천]
삼척포진은 1898년(고종 35)에 영장 김범구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