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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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太平洋會議時期學生同盟休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일제강점기 삼척보통학교학생들의 동맹 휴학.
[개설]
태평양회의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을 지지하는 삼척보통학교학생들의 동맹 휴학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1921년 7월 10일경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이 군축 문제와 극동 문제를 주제로 하는 태평양회의 개최를 발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하여 한국 문제도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 활동을 펴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국내와도 연결하여 후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경과]
태평양회의란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 9개국이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개최한 워싱턴 군축회의를 말한다. 태평양회의는 군축 문제와 극동 문제를 주제로 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 운동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하여 한국 문제도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 활동을 펴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한국 외교후원회(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를 결성하는 한편 국내와도 연결하여 후원 활동을 하게 하였다.
한편 천도교에서도 3·1운동과 같은 시위 운동을 계획하기로 하는 등 그 밖에 여러 가지 방법이 추진되고 있었다. 각급 학교 학생들의 선전 활동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문제는 삼척에서도 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선전 활동과 동시에 동맹 휴학을 계획할 정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때에 1921년 11월 초 삼척 지역에서도 태평양회의와 관련된 선전문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학교에도 우편으로 선전지가 온 것을 학교에서 감추었다는 소문과 때마침 11월 4일 암살당한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총리대신과 관련된 풍문 등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 교장 야마다 히로시[山田浩]는 하라 총리 암살이 한국의 독립운동자라면서 훈화 시간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근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야마다 교장은 독립운동자의 하라 총리 암살의 이유로 태평양회의와 관련해 국제 사회에서 하라 총리의 신망이 높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학년 오원모(吳元模)를 주축으로 최삼룡(崔三龍), 심부윤(沈富潤), 김윤달(金潤達)이 주동하여 동맹 휴학을 계획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11월 9일 서울에서 보내온 것처럼 선전지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등굣길에 볼 수 있도록 길에 뿌려 놓기로 하고 비밀리에 학생 회의를 열어서 동맹 휴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전에 발각되어 김기덕(金基德)[직원 명단에는 김기홍(金基弘)으로 되어 있다.] 교사와 관계 학생들이 모두 일본 경찰에 잡혀 들어가 고초를 겪었다. 이때 경찰에 잡혀 간 김기덕 교사와 오원모가 쓴 자술서는 오원모의 장남으로 강원도 교육위원을 지낸 오병선(吳炳善)이 보관하고 있다.
삼척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운동은 실행 직전에 탄로되어 중단되고 말았지만 보통학교 학생들이 국제 회의에 대처한 민족 운동을 계획하였다는 점과 선전지를 자기들이 손수 제작하였다는 점 등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결과]
동맹 휴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삼척보통학교학생들의 동맹 휴학 계획은 아쉽게도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는 못하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을 위한 활동과 그에 대한 국내의 지지가 어우러진 민족 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줄기찬 독립 의지를 거듭 밝힌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