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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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九零六年義兵活動 |
영어공식명칭 | Activities of the Righteous Armies in 1906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1906년 이후 삼척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
[개설]
을사의병과 정미의병 기간에 삼척 지역에서 의병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을사조약의 불법 강압 체결과 정미 7조약에 따른 군대의 강제 해산이 의병 봉기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경과]
1906년(고종 43) 7월 11일 삼척에서 신돌석(申乭石)[1878~1908]과 함께 의병 투쟁에 나선 황청일(黃淸一)[1851?~1924], 이구재(李九載) 등 6명이 강원도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압송된 뒤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7월 30일 일본군사령부 의병진압차 소속 병력을 강원도 울진, 삼진(三陳)[삼척(三陟)의 오기로 보인다.] 방면으로 파견하였지만 의병 활동 침체에 따라 철수하였다.
1907년(순종 융희 원년) 10월 30일 삼척군 미로면 정동에서 의병 500여 명이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1월 16일 사곡동[원덕읍 사곡리]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4~5시간 접전하다가 퇴각하였다.
11월 18일 김생산(金生山)의 의병 약 600명이 삼척군 황지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김생산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1월 26일 변학기(邊鶴基)의 의병 약 120명이 삼척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2월 일본군이 수집하여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동일 집단의 이동인지 별개 집단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삼척군 근덕면 용화리 부근에 의병 200여 명,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영은사(靈隱寺)를 근거로 한 300~400명, 삼척군 신양동(新陽洞)[신양동이란 지명은 없다. 지금의 원덕읍 산양리(山陽里)로 생각된다.] 지점에 약 200명의 의병들이 모여 있다는 보고가 있다. 삼척군 노곡면 무중동(武中洞)[지명 확인 미필]과 삼척군 하장면 갈전리(葛田里) 방면에 의병 200여 명이 모여 있다는 보고가 있다. 삼척군(三陟郡)무라이(ムライ)에 있던 비수(匪首)는 신모(申某)이며, 현시(現時) 동군(同郡) 도쓰쿠(トツク)[지금의 울진군 덕구(德丘)의 일본어식 오기일 것으로 추정된다.]와 고무네(コムネ)라 칭(稱)하는 지방(地方)에 6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다고 했다. 도쓰푸(トツプ)[トツク의 오기일 것이다.]까지는 9리(九里)라고 되어 있다.
1908년(순종 융희 2) 3월 1일 강원도 삼척군 내에서 약 50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3월 중순 변학기 의진이 삼척에 머물렀다. 이를 파악한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봉화 방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의진의 부장 홍병팔(洪秉八)이 체포되었다.
4월 13일 삼척군 원덕면 월천리에서 의병과 일본군이 접전하였다. 4월 15일 신리동(新里洞)[도계읍 신리가 거의 확실하다.]에서 의병 14~15명이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4월 17일 정경태(鄭敬泰) 의진 30명이 삼척과 울진의 경계인 응봉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사동(沙洞)[원덕읍 사곡리가 거의 확실함]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5월 8일 도계에서 의병과 일본군이 접전하여 의병 20명이 전사하였다.
5월 9일 새벽 신리(新里)[도계읍 신리]에서 약 5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8시간가량 접전을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패주하였다. 일본군의 보고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의병의 피해는 전사자가 62명, 부상자는 30명이었다.
5월 9일 오후 4시 30분 가곡동(柯谷洞)[삼척시 가곡면]에서 약 400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패주하였다. 일본군의 보고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의병의 피해는 전사자가 40명, 부상자는 10여 명이었다.
5월 25일 삼척 관내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었다.
6월 1일 삼척 관내[삼척 서남 구십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하여 20명이 전사하였다.
6월 19일 삼척 관내[미로면 남방이나 노곡면 북방으로 추정된다.]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었다. 일본군의 보고에 따르면 의병의 수는 19명이었고, 그 가운데 1명이 전사하였다.
6월 28일, 7월 7일, 7월 14일 삼척 관내 각지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산발로 벌어졌다.
10월 29일 삼척군임원진분견소 병력 6명과 의병 10여 명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의병 2명이 전사하였다.
[결과]
수로는 압도하였고 구국의 의지도 높았을 것이지만 무기 열세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실패하였다.
[의의와 평가]
후기 의병 기간에는 삼척 의진, 삼척 전투 같은 이름으로 불린 의병 부대나 대규모 전투도 없었다. 일본의 침략을 몰아내는 데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 정신은 1914년의 임원리 사건, 1919년의 삼척보통학교 만세 사건, 1931년의 근덕면 사무소 습격 사건 등 줄기차게 이어진 항일 투쟁의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