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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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幹會三陟支會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 Branch of Singanho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신간회 삼척지회는 항일 민족 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삼척 지역 지회로 1928년 3월에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 유입으로 독립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갈라지면서 민족 운동 전선에 갈등이 생기게 되자 단일화된 민족 운동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민족유일당 운동(民族唯一黨 運動)이 전개되었다.
신간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에 자극되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 진영 간 타협에 의하여 1927년 2월 15일 조직된 일제강점기 때 최대 규모의 합법 민족 단체이며, 신간회 삼척지회는 그 이듬해인 1928년 신간회의 설립 목적에 부응하기 위하여 조직된 삼척 지역의 신간회 지회이다.
[변천]
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간악한 정책을 폭로하는 한편 구금된 학생들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민중 대회를 열 것을 계획하다가 대다수 간부가 체포·구금되고, 거기에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알력이 일어난 가운데 소련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마침내 1931년에 해체됨으로서 명맥이 끊겼다. 신간회 삼척지회와 삼척청년동맹의 해체도 이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는 각 도는 물론 각 군에도 지회를 조직하였다. 강원도에서는 1927년 7월 12일 춘천기독교회관에서 14개 단체 대표 41명이 모여 전 강원도 사회운동단체인회(全江原道 社會運動團體人會)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 지지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이것을 계기로 강원도 내 신간회 지회 결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삼척에서는 1928년 3월에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릉에서 각지 대표자 회의를 열어 강원 청년 연맹을 결성하고 1929년 7월에는 원주 공회당에서 강원 청년 연맹 제1차 대회를 열었다. 1930년 7월에는 삼척에서 제2차 대회를 열었지만 삼척 대회를 허가했다는 이유로 삼척 경찰서장이 파면당한 일도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삼척 지역에도 청년동맹, 신간회 삼척지회·농민조합·노동조합 등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고는 전해지지만 구체화된 자료는 물론 구술해 줄 사람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신간회 삼척지회는 1928년 3월 8일 『동아일보』에 관수동 신간회 본부에서 6일 오후 5시 신간회 제2년 제2회 총무 간사회를 열고 논산·삼척·풍천 등 3개소 지회 설립을 승인하였다는 보도가 있고 나서 사흘 뒤인 11일에 설립되었다.
신간회의 각 지회 설립 과정에서 주도 역할을 한 것은 지방의 신문 기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신간회 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지국 사무실에서 개최되거나 준비위원회 사무실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간회 삼척지회의 설립도 당시 삼척 주재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삼척청년동맹 결성에 앞장선 정건화, 심부윤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두 단체의 맥이 서로 통함을 알 수 있다.
1929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에 “강릉 청년 동맹 제2회 정기대회가 5월 8일 금정 미감리 강습소(錦町美監理講習所) 내에서 개최된바 멀리 신간회 삼척 지회에서 온 동지자들 7~8명의 열렬한 축사가 있었다.”는 보도, 1929년 7월 26일자 『조선일보』 「신간회 지방순회」에 “신간회 중앙본부는 1929년 7월에 주요 사업의 하나로 전국 지방 순회 강연을 계속하였다. 제1대로 교육부장 조병옥이 1929년 7월 24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호남 지방을 약 4주일간 순회하면서 특별 순회강연을 하여 신간회의 이념과 정신을 선전하고 지회 활동을 격려 강화하였다.”는 기사, 1929년 8월 15일자 『조선일보』 「신간회 지방순회 계속」에 “제2대로 1929년 8월 15일 중앙상무 집행 위원 안철수(安喆洙)를 영남 지방에, 박문희를 주로 관동 지방과 영남 일부에 파견하여 4주간 각지를 다음과 같이 순회 강연을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안철수 … 김천·상주·예천·영주·봉화·안동·의성·군위·신녕·경주·하양·영천·경산·칠곡·선산, 박문희 … 고성·양양·강릉·삼척·울진·양산·동래·기장·부산·김해·청도·대구·고령”이라고 되어 있다.
신간회 관련 연구자들의 글에 따르면 신간회는 지회마다 주민 권익 옹호 활동에도 힘썼다고 한다. “한국 해안에서는 일본인 선주 및 어부들과 한국인 어부들 사이에 충돌과 분쟁이 많았지만 신간회 지회들이 불리한 여건에 있는 한국인 어부들의 권익을 옹호하여 활동하였다. 제주지회·부산지회·군산지회·강릉지회·양양지회·삼척지회는 그 대표적 지회였다.”고 한다.
이러한 신간회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간악한 정책을 폭로하는 한편 구금된 학생들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민중 대회를 열 것을 계획하다가 대다수 간부가 체포·구금되고, 거기에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알력이 일어난 가운데 소련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마침내 1931년에 해체됨으로서 명맥이 끊어졌다. 신간회 삼척지회와 삼척청년동맹의 해소도 이에 따른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1927년 10월 삼척청년동맹을 조직한 정건화, 심부윤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경제 항일 운동인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비롯한 민족 운동을 이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