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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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邑城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eup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유재춘 |
조성|건립 시기/일시 | 947년(정종 2) - 삼척읍성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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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건립 시기/일시 | 1386년(우왕 12) - 삼척읍성 남은이 둘레 약 445m[1470척] 높이 약 1.2m[4척] 규모로 토성을 축조함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2012년 - 삼척읍성 발굴 조사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489년(성종 20) - 삼척읍성 부사 조달생이 토성을 증축함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10년(중종 5) - 삼척읍성 부사 이윤중이 관동 장정을 동원하여 석성으로 고쳐 쌓음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55년(명종 10) - 삼척읍성 부사 김희삼이 해자를 파고 민가 20여 호를 철거시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592년(선조 25) - 삼척읍성 부사 김위가 동문과 서문의 성곽을 추가로 축조하고 회로 성벽을 메움 |
현 소재지 | 삼척읍성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
성격 | 읍성 |
관련 인물 | 남은|조달생|이윤중|김희삼|김위 |
[정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삼척 지역의 치소(治所)가 위치하여 있던 읍성.
[개설]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의 시내 중심가를 둘러싼 구릉지의 자연 지형을 따라 곡선으로 쌓은 평산성이다. 서쪽 절벽 위에는 죽서루가 오십천가에 있다. 남쪽은 평지이지만 북·동쪽은 다소 높은 구릉지로, 천주교회가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어 여러 차례 개축을 거친 읍성으로,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성벽과 옹성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건립 경위]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에 쌓았다고 하지만 자세하지 않고, 1386년(우왕 12)에 이곳 만호겸지군사(萬戶兼知郡事)로 온 남은(南誾)[1354~1398]이 둘레 약 445m[1470척, 절벽은 제외], 높이 약 1.2m[4척] 규모로 토성을 축조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토성(邑土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약 980m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면(三面)이 석축이다. 둘레는 2054척[약 622m], 높이는 4척[약 121㎝]인데 서쪽은 절벽으로 길이가 431척[약 131m]이다.”라고 하고 있다.
조선시대인 1489년(성종 20) 부사 조달생(趙達生)이 토성을 증축했고, 1510년(중종 5) 부사 이윤중(李允中)이 관동(關東) 장정을 동원하여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1555년(명종 10) 부사 김희삼(金希參)이 해자를 파고 민가 20여호를 철거시켰으며, 1592년(선조 25)에 부사 김위(金偉)[1532~1595]는 동문과 서문의 성곽을 추가로 축조하고 회(灰)로 성벽을 메웠다.
[위치]
삼척읍성은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삼척읍내 중심지를 둘러싼 읍성 형태이다.
[현황]
현재 읍성지는 오래 전 대부분 훼손되어 없어졌지만 성내동 97번지 부근인 북쪽 약 10m의 기초 부분에 1~2단의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남서쪽에는 높이 1.0~1.8m의 성벽이 약 166m 남아 있었지만 근래에 모두 없어졌다. 석축부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성내동 17번지 일대로, 높이 3단의 1.8m이다. 이 부분은 길이 100㎝, 두께 30㎝ 안팎의 석재를 2~3㎝씩 퇴물림하면서 쌓았으며, 내탁으로 축성한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2010~2012년의 죽서루 주변 발굴 조사에서 삼척읍성의 토성과 석성이 확인되었다. 토성은 Ⅰ~Ⅳ 조사 구역 가운데 Ⅱ구역에서 노출되었다. 판축 기법을 사용하여 축조한 체성벽과 내외벽에 사질점토를 사용한 외피토루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기단석렬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영정주는 수혈 굴착 후 쐐깃돌을 사용하여 고정시켰다. 토성 축조 시의 층위에서 확인되는 유물들이 대체로 고려 말에 집중되고 있어 고려시대인 1386년(우왕 12)에 축조되어 조선시대인 1510년(중종 5)에 석성이 축조되면서 용도 폐기되었다는 기록과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석성은 Ⅳ구역에서 노출되었다. 민가 건축으로 말미암아 유구가 훼손되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최하단에 폭 60~80㎝의 다소 큰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외벽은 직각에 가깝게 축조하였고 내벽은 내탁 방식으로 축조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척읍성 고고학 조사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원도 삼척도호부 고적조에 기록되어 있는 ‘고읍성(古邑城)’ 문제이다. 고적조에는 “고읍성: 3면이 흙으로 쌓였다. 둘레가 1444척이고, 높이는 7척이다. 서쪽은 절벽이 408척이다.”라고 하여 삼척 읍성에 대한 규모 기록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읍성은 말 그대로 ‘옛 읍성’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의 위치나 성격은 명확하지 않다.
이것이 기재된 시기는 15세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고읍성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조선성종대에 증축되기 이전의 토성을 말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읍토성’ 이전의 다른 토성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