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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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芝生 |
영어공식명칭 | Park Jisae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도식 |
[정의]
조선 후기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활동한 자선가.
[가계]
박지생(朴芝生)은 진사 박세영(朴世榮)의 손자이고, 향노(鄕老) 박영백(朴苓百)의 5세손이다. 아들로 박사철(朴斯哲)이 있다.
[활동 사항]
박지생의 자(字)는 무숙(茂叔)이고, 호(號)는 동은(東隱)이다. 박지생은 북삼 홍월평[현 동해시 이도동]에 수로를 개척하고 홍월평을 넓게 개간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보았기 때문에 부사 신경희(申景禧)가 부역을 면제시켰다. 1689년(숙종 15)에 이계(李桂), 이빈(李彬) 등이 기통헌(奇通獻)에게 매득하여 두타산 유두원의 원답(元畓)을 소유하였다. 그런데 이계가 도리어 토지를 빼앗으려는 욕심을 부렸다. 그는 이 땅을 빈궁(嬪宮)해서 팔았다고 빙자하였다. 이에 박지생의 아들 박사철이 농민들을 이끌고 원통함을 호소하여 완문을 받았다고 한다. 1844년(헌종 10)에 속제(俗齊)김시학(金時鶴)이 주창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호군(護軍) 박지생의 공적비(功績碑)가 건립되어 있다. 박지생 공적비에 기록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1899년(고종 36) 겨울 12월 내가 명을 받들어 삼척부사로 임명받았는데 부(府)의 지(誌)에는 “향노(鄕老) 박영백(朴苓百)에게 5세손 지생(芝生)이 있어 땅을 가려서 물을 끌어들여 관개(灌漑)하여 이익을 본 논이 거의 1000경(頃)이 넘었으며, 북평의 오거(五渠)와 박거(朴渠)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하였다. 내가 보고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5년이 지난 1904년(고종 41)에 이르러 그의 6세손 시협(始協)이 그의 조상의 사적 후서(後序)를 가지고 와서 보이고 이어서 나에게 비석의 뒷면에 기록할 것을 요청하였다. 대개 이 서문은 곧 김생이 불빛에서 생각하여 지은 것이다. 김생은 학행과 문체가 뛰어나고 반드시 아첨을 좋아하지 않는 자로, 하물며 그 말의 상세함 또한 다함이랴. 나 또한 어찌 군소리를 하겠는가? 삼가 그 서문을 살펴보니 “삼척의 북쪽 1여 리 정도에 백령산(白嶺山)과 취병산(翠屛山)의 사이에 홍도리(紅桃里)가 있다. 리(里)에는 하나의 작은 들판이 있는데 둘레는 6~7리 정도이다. 그 땅은 농사짓기에 적당하지만 특별히 관개(灌漑)할 물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 바라보아도 황무한 것이 마치 버려진 땅과 같았다. 1584년(선조 17) 봄에 부호군 박공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곳에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있는데 어찌 개간할 방법이 없겠는가?”하였다. 마침내 도랑을 파서 개통할 계획을 세웠으며, 따르기를 원하는 수십 명 가운데 힘을 발휘하는 사람은 김예순(金禮順)이었다. 깎은 돌로 개울을 통하게 하고 쪼개진 나무로 물줄기를 끌어들였다. 수년 동안 공들인 결과 산의 굴곡을 따라 촌을 둘러싸고 구불구불 가는 모양이 거의 10여 리에 가까웠다. 이로부터 논밭이 넓게 개척되고, 각각 경계가 정해져서 쟁기를 멘 사람도 가고 곡식을 심고 가꾸는 사람도 갔으니 토질의 비옥함이 읍에서 으뜸이었다. 그때 재상 신경희(申景禧)가 듣고 가상히 여겨 그 호역(戶役)을 밝혀서 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붉은 뱀을 만나 불행하게도 간사한 무리가 있어 현혹시켜 우예지송(虞芮之訟)을 야기시켰다. 공은 그의 자손 사철(斯哲)로 하여금 모든 농민을 인솔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도록 하였고, 마침내 의리의 다툼에서 이겼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생활은 넉넉한 삶에 이로움을 더하였던 것이다. 물론 공부(公簿)에 실린 대로 거두어들인 세금은 매년 또한 80여 금(金)이 되었다. 지금까지 300여 년 동안 공으로나 사로나 힘입은 바가 산과 바다가 높고 깊은 것과 같이 이후 영구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적과 효력에 힘입은 사람들을 더욱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후손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말하였다. “너희 선조의 빛나는 업적이 이미 읍지에 실려 한 가문의 기록이 영원히 전해지지 않음이 없는데 어느 때에 금석(金石)을 깎아서 밭두둑에 세워 나중에 밭 가는 자와 수확하는 자로 하여금 그의 공적을 모두에게 영원히 알게 하기 위하여 노래로 그를 칭송하겠는가? 아! 선조의 공적을 큰소리로 말한다면 삼척 백성들도 그들처럼 은덕을 입었고, 오직 내가 궁핍하여 선조 묘에 해마다 올리는 제수도 오히려 성실하지 않은데 어찌 이것에까지 여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심히 슬프다. 아마도 이 토지를 지어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 그러나 마음과 힘을 쌓고 사용하여 토지를 넓게 개척하는 사람이 남을 위한 일에는 후덕하고 사사로이 경영하는 데에는 야박한 것을 보였으니 더욱 어찌 현명하고 또한 위대하지 아니한가?” 옛말에 “정성이 미치면 금석도 뚫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많은 논밭은 백성들의 마음과 정성이 감동하고 사모하게 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고 있는데 한 조각의 돌은 어디에 있는가? 마침내 그 말씀을 엮어서 한결같이 그 후손을 위하여 권면하고 한결같이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넌지시 타이른 것이니 이것이 김생이 서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여 함께 하천 위에 돌을 깎아 세우고 그 면에 큰 글자로 ‘부호군박공지생공적비(副護軍朴公芝生公蹟碑)’라고 썼다. 지금 이후 척주 사람들은 비로소 은혜를 알고 공적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옛날에 공이 수로를 만들어서 백성에게 풍요로움을 주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돌이켜 생각하고 그 일을 노래하여 “가래를 어깨에 메니 구름과 같고 도랑을 트니 비가 되었도다.”고 하였다. 지금 비석을 세우니 어찌 노래로 송축함에 비하겠는가? 내가 척주에 가서 일찍이 공적과 그 여러 후손들의 청함을 차마 멀리할 수 없어 마침내 서문 속내용을 보충하여 일의 처음부터 끝을 그를 위하여 기록한다.
알봉(閼逢) 집서(執徐), 즉 갑진년(1844년) 가을 9월 일 삼척도호부사 겸 강릉진영병마동첨절제사 성재(惺齋) 이인원(李寅元)이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