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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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振元 |
영어공식명칭 | Kim Jinwon |
이칭/별칭 | 금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청희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7월 3일 - 김진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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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2년~1928년 3월 - 김진원 삼척공립보통학교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1932년 - 김진원 삼척읍 면서기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김진원 삼척읍 정라부인야학회를 열고 정라부인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김진원 정라농어촌진흥회와 정라청년단 창설 정라청년단 단장으로 선출됨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김진원 정하리 서낭당 이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김진원 어유비 제조공장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김진원 정라진 최초의 사설 시장인 중앙염매소 개설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김진원 김원상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김진원 삼영수산 합자회사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김진원 중국 상해수산모집회사 고문에 추대됨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12월 25일 - 김진원 삼척 시내에서 처음으로 인력거 사업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김진원 초대 정라의용소방대장에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김진원 육향정, 척주동해비각 우전비각 건립 발의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김진원 삼애유치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김진원 항도극장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84년 - 김진원 육향정 출판 |
몰년 시기/일시 | 1996년 3월 12일 - 김진원 사망 |
출생지 | 김진원 출생지 - 강원도 삼척시 정하동 108 |
학교|수학지 | 김진원 수학지 - 삼척공립보통학교 |
활동지 | 김진원 활동지 - 강원도 삼척시 |
묘소 | 김진원 묘소 -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
성격 | 향토사학자|사회활동가 |
성별 | 남 |
본관 | 강릉 |
대표 경력 | 대한노인회 삼척군지부 이사 |
[정의]
현대 삼척 출신 향토사학자이자 사회 활동가.
[개설]
김진원(金振元)[1911~1996]의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호는 금성(錦城)이다. 1911년 7월 3일 강원도 삼척군 삼척읍 정하리 108번지에서 부친 김면경(金冕卿)과 모친 김해김씨김동하(金東河) 사이에서 3남 5녀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했다.
[활동 사항]
김진원은 1922년 개인이 운영하는 글방인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삼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3월 보통학교 졸업 후 1932년까지 3년여 동안 삼척읍 면서기로 근무하고 사퇴, 지역 사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로 사회·경제 분야 활동이었다.
1933년에는 삼척읍 정라부인야학회를 열고 삼척읍 정라부인회를 조직하였고, 1934년에는 삼척읍 정라 농어촌진흥회와 정라청년단을 창설하고 정라 청년단 단장으로 뽑혔다. 그리고 척주동해비각과 정하리 서낭당 건축에 쓰일 목재를 주선하였다. 1936년에는 어유비 제조공장을 세웠으며, 1937년 정라진 최초의 사설 시장인 중앙염매소를 개설하였다. 이듬해인 1938년에는 김원상사(金元商事) 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수산 선진지(先進地) 시찰을 위하여 일본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후 삼영수산(三榮水産)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수산 선진지 산업 시찰을 위하여 북조선·만주국 등을 다녀온 후 수시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또 1941년 중국상해수산모집회사 고문에 추대되었고, 1941년 12월 25일 삼척 시내에서 처음으로 인력거(人力車)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3년 8월 19일에는 삼척 경찰서장의 인가를 받아 정라 사설 시장을 개설하였다.
김진원은 지역 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45년 4월 30일 정하리 정회장(町會長)[지금의 이장 또는 동장]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석 달 반 뒤에 광복을 맞이하여 9월 1일 재실시한 이민총선거(里民總選擧)에서 다시 이장에 뽑혀 5년 동안 마을 일을 돌보았다. 또 1946년 광복 후 초대 정라의용소방대장에 취임하여 마을의 안전을 살폈다. 1947년에는 육향정, 척주동해비각, 우전비각(禹篆碑閣)[대한평수토찬비]의 건립을 발의하고 총지휘 책임 감독을 맡아 보았다. 대동 청년단을 창립하여 단장에 취임하였다. ‘육향정(六香亭)’ 현판 글씨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썼으며, 우전비각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 ‘우전각(禹篆閣)’은 이해에 결성된 대동청년단 삼척군단부의 결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삼척에 온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자 대동청년단 단장인 독립투사 지청천(池靑天)[1888~1957] 장군이 썼다.
교육·문화 분야로는 1948년 삼애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하였고, 1949년 병·의원이 없던 정라진에 3개의 병의원을 유치하였다. 또 문화시설이 없던 정라진에 1957년 항도극장[가설극장 형태]을 설립하면서 가설극장이 아닌 제대로 된 극장이 들어오도록 유도하였다. 1960년 4월 정라극장이 들어서자 항도극장 터에 삼척 최초로 탁구장과 당구장을 겸한 간이 골프장인 항도오락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1963년 10월 31일에는 삼척 지역 한학자들에게 의뢰하여 육향정·척주동해비각·우전비각의 기문(記文)을 짓고, 서예가 최중희(崔中熙)[1896~1990]의 글씨로 동해비(東海碑) 현판을 제작하여 교육청으로 하여금 걸도록 하였다. 삼척 상공회의소 창립의원과 정상리동 농업협동조합을 창설하여 초대 조합장에 취임하였다.
만년에는 향토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1980년부터 정라진 연구에 들어가 『육향정』 집필을 시작하여 1984년에 정라진의 100년 역사가 오롯이 담긴 『육향정』을 출판하였다.
[저술 및 작품]
향토 문화 연구서로 『육향정』이 있다.
[묘소]
김진원의 묘소는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진원은 정라진에서 태어나 정라진의 역사를 탐구한 향토사학자였고, 정라진의 문화생활을 선도하였다. 삼척 지역, 특히 정라진의 역사·문화 유적 보존과 정라진 주민의 사회·문화 복지 증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