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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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龍鎬 |
영어공식명칭 | Min Yongho |
이칭/별칭 | 문현,복재,진호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청희 |
[정의]
근대 개항기 삼척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민용호(閔龍鎬)[1869~1922]의 자는 문현(文賢)이다. 호는 복재(復齋)이며, 일명 진호(晉鎬)로 불렸다. 고려 말 충신 두문동현인(杜門洞賢人) 민안부(閔安富)의 후손이며, 현와공(弦窩公)민치겸(閔致謙)의 5남 가운데 장남이다. 민치우(閔致禹)에게 입양되어 명성황후와는 14촌 남매간이 된다.
[활동 사항]
민용호는 1869년 10월 25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민용호의 학통은 노사(蘆沙)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문인인 민치량(閔致亮)[1844~1932]에게 수학하였고, 화서(華西)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인 성암(誠菴)박문오(朴文五)[1835~1899]를 사사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위정척사의 양맥인 화서학파와 노사학파에 모두 접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용호는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발표되자 1895년(고종 32) 11월 29일 여주에서 기의하여 원주·평창·진부를 거쳐 관동으로 향했다. 1895년(고종 32) 12월 16일에는 강릉에 입성하여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창설하였지만 서로 간의 의구심(疑懼心)으로 12월 18일에야 비로소 강릉 의진과 합진하고, 단발을 강요하던 강릉 관찰부 친일 경무관 고준식(高俊植)[?~1895]을 효수하여 기의의 뜻을 밝혔다. 이어 동해안 열두 항구에 봉수장(烽燧將)과 망해장(望海將)을 임명하고 각지에 소모사(召募士)[의병을 모으는 사람인 모병관]를 파견하여 의병의 군세를 크게 늘렸다. 1896년 1월 21일에는 원산 공략에 나섰다. 공격에 앞서 미리 러시아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의병 계획을 밝히고 그들의 양해와 협조를 구하였다.
강릉 출발 당시 의진 규모는 2380명이었지만 북진하는 도중에 수가 너무 늘어나 포수들만 참여시켰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또 회양 의진 130명, 춘천 의병 180명, 고성과 간성 의병 240명, 기병(騎兵) 30명, 원산 현지 집결 300여 명이 합류하였다.
1896년 2월 4일 원산 공격 집결지 안변의 선평(仙坪)에 도착하였지만 심한 비바람과 진눈깨비로 대기하고 있다가 2월 6일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무기 열세로 패전하였다. 이 때문에 민용호는 자결을 결심하였지만 주위의 만류로 재기의 결의를 다지고 회양, 흡곡, 양구, 한계령, 양양을 거쳐 2월 21일 강릉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백봉령(白鳳嶺)과 대관령의 대공산성 전투를 치른 후 귀산, 비령(扉嶺)[삽당령], 백복령, 북평을 거쳐 4월 중순 삼척에 도착하였다.
1896년 4월 19일에는 경북 영양 의병장 김도현(金道鉉)[1852~1914] 의병진과 합세하여 삼척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탄약이 떨어져서 패퇴하였고, 이후 함경도 의진과 연합하여 다시 제2차 원산 공격을 계획하지만 여의치 않아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북상길에 올랐다. 갖은 어려움 끝에 8월 함흥부에 입성하였지만 원산 주둔 일본군이 대거 쳐들어옴으로써 삼수를 거쳐 8월 하순 백두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인 9월에 의병 해산 칙령이 내려짐에 따라 마침내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로 들어갔다. 1896년 10월 만주의 퉁화[통화(通化)]와 선양[심양(瀋陽)] 지방관을 만나 재기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고, 1897년 3월 다시 청나라의 실세인 대도독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와 북양대신 쑹칭[송경(宋慶)]에게도 도움을 간청하였지만 넘치는 환대만 받았을 뿐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1898년에는 허위(許蔿)[1855~1908], 채광묵(蔡光默)[1850~1906] 등이 조직한 황국협회에 참가하여 독립협회 격파와 독립협회 재건을 막기 위해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고 회계를 담당하였다. 1899년에는 평안북도 도공사원(都公事員)에 임명되어 호적 정리와 위민 업무를 성공시켰다. 1900년에는 만주 지방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민적을 정리하고 자치 조직으로 16개의 사(社)를 설치하는 한편 화이런[회인(懷仁)], 퉁화 지방관과 교섭 및 담판을 거듭하여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잡세·잡역을 면제하는 조약을 맺었다.
민용호는 중추원의관과 의주군수에 지명되었지만 군부협판 이한영(李漢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01년 1월 15일 인천을 출발해 중국 각지와 홍콩, 월남, 일본을 거쳐 다시 중국 남부를 돌아 1902년 여름 귀국한 후 10월 명성황후 천릉도감(遷陵都監) 감조관(監造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3년 1월 중추원 의관에 뽑히고, 7월 평안북도 위원(渭原) 군수에 이어 12월 30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다.
민용호는 1922년 8월 23일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에서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저술 및 작품]
민용호의 저술로는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서정일기(西征日記)」, 「강북일기(江北日記)」 등이 포함된 『복재집(復齋集)』 등이 있다.
[묘소]
민용호의 묘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면 병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훈장국민장(建國勳章國民章), 1990년에 건국훈장독립장(建國勳章獨立章)이 각각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