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1204 |
---|---|
한자 | 洪永義 |
영어공식명칭 | Hong Yeongeu |
이칭/별칭 | 백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현대 |
집필자 | 정연휘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4월 27일 - 홍영의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4월 8일 - 홍영의 사망 |
출생지 | 홍영의 출생지 -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금계리 |
성격 | 문학가 |
성별 | 남 |
본관 | 남양 |
대표 관직|경력 | 중앙대학교|효성여자대학교|청주대학교 교수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출신의 근현대문학가.
[가계]
홍영의(洪永義)[1915~1975]의 본관은 남양이다. 부친은 홍갑성(洪甲性)이며, 슬하에 4남 1녀가 있다.
[활동 사항]
홍영의는 1931년 근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삼척군영은사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시작하여 1933년 금강산유점사에서 불교를 수학하고 혜화전문학교 불교과를 졸업하였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일본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청주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다가 말년에 경기도 안양용화사 주지가 되었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에 따르면 홍영의가 문학에 뜻을 둔 것은 1930년 중반쯤이다. 소설가 방인근(方仁根)[1899~1975]이 『학우구락부』 국문판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을 때 홍영의, 구상 등이 투고를 하였다. 또 김경린(金璟麟)[1918~2006]과 조지훈(趙芝薰)[1920~1968]의 작품도 있었다. 그때 홍영의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산문을 공부하였다. 홍영의는 평상시엔 말도 많지 않고 말씨도 조용해서 온유한 선비지만 술이 한잔 들어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천성 선량이나 온축된 지식, 탁마된 자질과 수행 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현실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그 마수를 뻗어 팽창하고자 전쟁의 참화 속으로 젊은이를 끌어내던 암흑기에서 누구나 조금씩은 허탈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일본도요대학 졸업 논문인 「율곡 이이론(栗谷李珥論)」은 냉철한 판단력으로 율곡 사상을 편견 없이 논술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일문(日文)으로 작성함으로써 당시 일본 학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홍영의는 부산시금수사(金水寺)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는 그의 산문(山門) 시절 도반 안덕임 큰스님이 주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신설된 효성여자대학교의 교무처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하면서 문학활동을 본격 시작하였다. 홍영의는 1960년대 초에 다시 서울로 가서 불교 경전을 국역하였고, 『불교계』란 잡지를 주간하는 등 주로 불교 사업에 헌신하였다.
[학문과 저술]
장편소설 「노도」, 「열사의 풍속」, 「애정백서」 등과 수필집 『사라수초(沙羅樹杪)』, 『인생춘추(人生春秋)』 등이 있다. 특히 「애정백서」는 대구「매일신문」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금강저(金剛杵)』 26호를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