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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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津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00년대 추정 - 이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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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300년대 추정 - 이진 사망 |
본관 | 강진이씨 - 전라남도 강진군 |
입향지 | 강진이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눌왕리 |
세거|집성지 | 강진이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수산리|갈운리|고정리 |
성씨 시조 | 이진 |
[정의]
이진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강진이씨는 고려 후기 역적으로 몰린 이진(李珍)이 연기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눌왕리]에 입향하면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연기면의 수산리와 갈운리, 고정리[현 도담동, 아름동] 일대에 후손들이 거주하였다.
[연원]
이진[1300년대 인물]은 고려 충렬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왕명으로 왕륜사(王輪寺) 주지 인조(仁照) 등 21명과 더불어 왕이 특별히 부르지 않아도 궁내에 출입할 수 있는 총신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충선왕이 원에 소환되었을 당시 수행 보좌한 공(功)으로 공신이 되었다. 1351년(충정왕 3) 지도첨의상의(知都僉議商議)를 거쳐 1354년(공민왕 3)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는데, 11월 처인군(處仁君)으로서 천추사(千秋使)로 원나라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입향 경위]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강진이씨는 이진이 고려조에 역적으로 몰려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면서 남면 눌왕리에 낙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강진이씨가 눌왕리에 거주하기 전에는 공산이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전기 강진이씨의 주요 인물로는 세조 때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으로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낸 이터(李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을 지낸 이만균(李萬鈞), 학행이 있는 이사경(李思敬) 등이 있다.
이만균은 사마방목과 문과방목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데 본관(本貫)은 도강(道康)이고 거주지는 공주이다. 1507년(중종 2) 식년시에 생원, 1522년(중종 17) 식년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군수까지 지냈다. 도강은 강진의 옛 이름으로 고려 때의 지명이다. 1417년(태종 17)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쳐 강진군이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세종특별자치시의 남면 일부가 공주목에 속하였다. 따라서 강진이씨는 조선 전기에 이미 남면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만균의 가계를 살펴보면 증조부는 이영기(李英奇)이고 할아버지는 세조 때 원종공신을 지낸 이터(李攄)이며 아버지는 창신교위(彰信校尉) 이인문(李仁文), 어머니는 안민행(安敏行)의 딸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이만균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현황]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에서는 눌왕리에 강진이씨가 53가구 거주하는 강진이씨 동족 마을로 보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