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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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溝溫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온치순 소정면 대곡리에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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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금구온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
성씨 시조 | 온달 |
입향 시조 | 온치순 |
[정의]
고구려의 온달을 시조로 하고 온신을 중시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금구온씨(金溝溫氏)는 생원공파 파조인 온치순이 조선 전기에 소정면 대곡리로 입향하여 거주해 왔다고 전해진다. 금구온씨는 조선 후기에 전의이씨와 통혼하였으며, 묘소도 대곡리에서 확인되고 있다.
[연원]
금구온씨의 시조는 고구려의 온달(溫達) 장군이고, 온신(溫信)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온신은 우부시랑(右部侍郞)으로서 1366년(고려 공민왕 15) 이존오(李存吾)·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권신(權臣) 신돈(辛旽)의 전횡(專橫)을 탄핵·상소한 것이 빌미가 되어 거야부곡(巨野部曲)[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거야마을]으로 폐출되었다. 당시 거야부곡은 금구현(金溝縣)에 속하였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금구온씨가 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금구현에 속하여 있는 거야현(巨野縣)과 종정향(從政鄕)의 성(姓)으로 각각 온씨가 수록되어 있다.
[입향 경위]
소정면 대곡리의 ‘맹골[孟谷]’ 마을에는 오래전에 금구온씨가 들어와 터를 잡아 살아왔다. 온신의 자손은 아들 온림(溫琳), 손자 온윤(溫潤), 증손 온후(溫厚)로 이어진다. 온후의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인 온치순(溫致順)이 맹골 금구온씨의 조상이다. 온치순은 문종조에 성균생원을 지냈다고 하며, 온치순 후손들은 생원공파로 불린다.
금구온씨 문중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입향설에 따르면 ‘7세손 온승손(溫勝孫)이 왕을 업어 피란시키고 공(功)으로 대곡리 일대를 사패지(賜牌地)[고려와 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로 받았으므로 대곡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증 자료는 찾기 어렵다. 족보의 기록에 온치순의 아들인 온원손(溫元孫)에 대해 ‘그의 처자가 충청도 천안에 이거하였다’고 수록되어 있으며, 온승손에 대해서도 ‘이거천안(移居天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14세손인 온계명(溫啓明)[1665~?]까지의 묘소 위치를 족보상에서 확인할 수 없다. 온계명의 아들인 15세손 온이재(溫以載)[1712~1792]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의 묘가 천안 대사동[1914년 이전의 대사동은 천안 소동면에 속함]에 있으며, 온이재의 어머니인 온명의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가 전의이씨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금구온씨는 조선 후기에 대곡리를 터전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현황]
금구온씨 생원공파는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의 맹골과 한절골 등지에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