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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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昌孟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윤희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858년(철종 9) - 맹정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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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 맹정섭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1800년대 후반 - 맹정섭 입향 시기 추정 |
본관 | 신창맹씨 본관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
입향지 | 신창맹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
세거|집성지 | 신창맹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
묘소|세장지 | 신창맹씨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
성씨 시조 | 맹자 |
입향 시조 | 맹정섭 |
[정의]
맹자를 시조로 하고 맹정섭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맹자(孟子)를 시조로 하고 맹의(孟儀)를 중시조로 하는 신창맹씨는 1600년대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에 묘역을 조성한 이래 후손들이 1800년대 후반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연원]
신창맹씨의 시조는 유명한 사상가 맹자(孟子)이다. 중시조는 맹자의 51세손 맹의로, 고려 충렬왕 때 예부시랑을 거쳐 예부전서에 오르고 충선왕 때 신창백(新昌伯)에 봉하여졌다. 이후 후손들은 신창을 본관으로 삼아 신창군파(新昌君派), 사직공파(司直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로 분파되어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 오고 있다.
[입향 경위]
연서면 고복리에 신창맹씨 호군공파가 정착하게 된 것은 맹주서(孟胄瑞)[1622~?]와 관련 있다. 맹주서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1360~1438]의 10세손으로,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우승지·호조참의·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맹주서는 당시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와 가까운 고복리에 묘소를 잡고 아산 송악면에 있던 증조부의 묘를 옮겼다. 이후 고복리에 세거하지 않다가 후손 맹정섭(孟鼎燮)[1858~1920]이 천안시 광덕면에서 이거하면서 신창맹씨 호군공파를 형성하였다.
[현황]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신창맹씨는 1985년 19가구 59명, 2000년 14가구 47명이 확인된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신창맹씨는 102명으로 남자 48명, 여자 54명이다.
[관련 유적]
연서면 고복리 마을 뒷산을 맹씨종산, 신창맹씨 묘소가 있는 골짜기를 정강골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맹만익(孟萬益)의 묘를 이장하던 중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갔다 하여 까들봉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