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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채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558
한자 仁川蔡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300년대 추정 - 채승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300년대 추정 - 채승 사망
입향 시기/일시 1300년대 추정 - 채승 입향
분관|분종 시기/일시 1300년대 추정 - 채승 참의공파
본관 인천채씨 - 인천광역시
입향지 인천채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문주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인천채씨 집성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합강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인천채씨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고복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인천채씨 재실 금연사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채선무
입향 시조 채승

[정의]

채선무를 시조로 하고 채승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채선무를 시조로 하고 채승(蔡昇)을 파조로 한 인천채씨 참의공파(參議公派)가 1300년대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문주리에 입향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합강리로 옮겨 정착하였고 집성촌을 이루며 일가를 형성하였다.

[연원]

인천채씨 시조 채선무는 고려시대 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인천에 세거하여 후손들은 인천을 관향(貫鄕)[시조(始祖)가 난 곳]으로 삼았다. 후손 채귀하(蔡貴河)는 고려 후기에 정몽주(鄭夢周)와 교류하고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절개를 지키고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였다. 이후 직장공파, 필선공파, 판서공파, 참의공파, 군수공파, 생원공파, 배천공파, 복순공파로 분파되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입향 경위]

황해도 평산에 거주하던 채귀하는 세상이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네 아들을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도록 하였다. 이에 셋째 아들 채동양(蔡東陽)은 아들 채승을 연동면 문주리로 데리고 와 살도록 하고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채승 이후 문주리에 세거하다가 5세손 채윤호(蔡允浩)[1485~1546]의 아들 채상(蔡詳) 때 합강리로 옮겨 인천채씨 참의공파를 형성하였다.

[현황]

합강리 인천채씨는 1960년대에는 80가구, 1996년에는 26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2000년 연기군인천채씨는 65가구 181명이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합강리가 편입되어 2019년 4월 합강리에는 4가구가 남아 있고 명학리 등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관련 유적]

합강정(合江亭)과 관련된 채윤호와 채윤구(蔡允龜) 형제에 관한 내용이 『금곡집(錦谷集)』에 기록되어 있다. 형제는 연기와 공주 사이에 은거했고 조광조(趙光祖)와 가깝게 지냈으나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자 합강정에 올라 통곡하여 시를 지었다 한다. 채관형(蔡觀亨)[1751~1817]과 부인 경주최씨의 효행으로 고종 때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아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되었다. 정려가 허물어지자 1968년 합강리 마을 입구에 효자·효부비를 세웠다. 인천채씨 묘역은 연서면 고복리에 조성되어 있으며 재실 금연사(錦燕祠)는 연서면 와촌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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