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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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松沈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650년(효종) - 심한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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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769년(영조 45) - 심익도 출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77년(숙종 3) - 심한기 사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794년(정조 18) - 심익도 사망 |
본관 | 청송심씨 - 경상북도 청송군 |
입향지 | 청송심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금남면 석교리 |
세거|집성지 | 청송심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금남면 석교리 |
묘소|세장지 | 심한기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
묘소|세장지 | 심익도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황용리 |
성씨 시조 | 심홍부 |
입향 시조 | 심한기|심익도 |
[정의]
심홍부를 시조로 하고 심한기, 심익도를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청송심씨는 곡산공파 심한기가 17세기 소정면 대곡리에, 인수우윤공파 심익도가 18세기 금남면 석교리에 각각 입향하여 세거하여 오고 있다.
[연원]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한다. 생몰 연대나 사적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심홍부의 현손인 심덕부(沈德浮)[1328~1401]는 고려 후기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功)을 세웠으며 특히 1380년(우왕 6)에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實戰)[실제의 싸움]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6년(우왕 12)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요동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같이 회군하여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功)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회군한 공로로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여졌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았다. 심덕부의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일곱 명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청송심씨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거족(巨族)[대대로 번창하고 문벌이 좋은 집안]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이루어졌다.
[입향 경위]
소정면 대곡리 청송심씨 곡산공파(谷山公派)는 심수를 파조로 한다. 입향조는 승지(承旨)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된 심한기(沈漢紀)[1650~1677]로 자는 기지(紀之)이다. 심한기의 아버지는 한림(翰林) 응교(應敎)를 지낸 심사홍(沈思泓)이며 어머니는 박자신(朴自新)[1607~1682]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는 전주유씨(全州柳氏)이다.
후손의 전언에 의하면 심한기의 일가는 원래 한양에서 거주하였다 하며 질병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대곡리 한적골로 입향하였다고 전하는데, 어머니가 밀양박씨 연안공파 박자신의 딸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전부터 한적골 일대에 세거하고 있던 밀양박씨는 연안공파와의 연고로 인해 한적골로 입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남면 석교리의 청송심씨는 인수우윤공파의 후손들이다. 입향조 심익도[1769~1794]는 1642년(인조 20)에 생원시와 진사시 양과에 입격한 심지치(沈之治)[1607~?]의 아들로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1642년에 생원시와 진사시 양과에 입격한 심지치는 사마방목에 당시의 거주지가 서울[京]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경기도 용인에서 살다가 금남면 석교리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부친의 묘소가 용인 무곡리에 있었으니 가족이 함께 왔다기보다는 심익도 혼자 왔을 가능성이 크다. 심익도의 처가도 이웃 마을 황룡리였으며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어 처가의 산에 묻혔다고 한다.
[관련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