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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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懷德黃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본관 | 황덕황씨 -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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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황덕황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 |
세거|집성지 | 황덕황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 |
묘소|세장지 | 황삼외 사당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소정리 안말 |
성씨 시조 | 황윤보 |
입향 시조 | 황석남 |
[정의]
황윤보를 시조로 하고 황석남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회덕황씨는 세마공파의 황석남이 1600년대에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난 후 처향(妻鄕)[아내의 관향(貫鄕)]이면서 당시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땅이었던 소정면 소정리에 입향한 것으로 추측된다. 후손들이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과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에도 거주하고 있으며 일명 풍세파라고도 불린다.
[연원]
회덕황씨(懷德黃氏)의 시조(始祖) 황윤보(黃允寶)는 고려 때 지문성부사(知文成府事)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회천군(懷川君)에 봉하여졌다. 황윤보가 정치적 혼란기를 피해 말년에 회덕으로 낙향하여 거주하면서 회덕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회덕황씨 시조(始祖)가 되었다. 4세손 황자후(黃子厚)[1363~1440]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고 황자후의 아들 황유(黃裕)는 조선 태종의 서녀(庶女) 숙안옹주(淑安翁主)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로 회천위(懷川尉)에 올랐다. 황유(黃裕)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황삼성(黃三省)은 1552년(명종 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헌, 홍문관교리 등 청직(淸職)을 역임하고 1563년(명종 18)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입향 경위]
소정면 소정리 회덕황씨는 세마공파로 황삼외(黃三畏)를 파조로 한다. 입향조는 황삼외의 계자(系子)[양자]인 황석남(黃錫男)이다. 황석남의 친아버지는 황삼계(黃三戒)이며 황삼외는 양아버지이다. 황석남은 황삼외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름]하였다. 황석남의 처는 한양조씨 조원지의 딸이며 김충남의 외손녀였다. 김충남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청주에 사는 조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안의 별감 김응신과 더불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유성룡의 증언으로 혐의를 벗었다. 김충남의 외손녀 사위였던 황석남이 이러한 인연을 통해 소정리 지역에 입향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소정리는 조선 후기에는 청주 땅이었다.
한편 안골 남쪽을 조텃골이라고 일컫는데 이를 조씨가 살았던 터로 본다면 입향 유래를 황석남의 처가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황석남의 생몰년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600년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지중추에 이르렀고 청주 덕평 내동에 묘를 썼다. 족보에 기록된 청주 덕평 내동은 2019년 현재 소정리 안말이다. 황석남의 후손들이 소정리와 풍세 일대에 대대로 거주하였고 황석남의 아버지인 황삼외를 모신 사당이 1982년 안말에 건립되었다. 이웃한 풍세 여수물[狐井]에 종가가 있다. 이러한 연유로 풍세 여수물의 회덕황씨는 ‘풍세파’라고도 불린다.
[현황]
황석남의 당질인 황세정(黃世楨)은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수학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황세정의 아들 황렴(黃燫)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와 현감을 지냈다. 황세정도 전의에 거주하였다. 회덕황씨 세마공파는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호정리와 아산시 신창면 등에도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