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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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聃年 |
영어공식명칭 | Seong Damnyeon |
이칭/별칭 | 인수,정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성종 1) - 성담년 별시 문과에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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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77년(성종 8) - 성담년 경연검토관이 됨 |
활동 시기/일시 | 1479년(성종 10) - 성담년 공조정랑과 이조정랑이 됨 |
몰년 시기/일시 | 1483년(성종 14) - 성담년 가의대부사헌부대사헌창녕부에 추증 |
거주|이주지 | 은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
묘소|단소 | 성담년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홍문관교리 |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문신으로 생육신 성담수의 동생.
[개설]
성담년(成聃年)은 조선 전기에 문과 급제한 문신으로,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에 세거하는 창녕성씨 입향조이다. 생몰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가계]
성담년의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인수(仁叟), 호는 정재(靜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예문관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이며, 할아버지는 성개(成槪)이다. 아버지는 승문원교리 성희(成熺),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생육신 성담수(成聃壽)가 성담년의 형이다.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는 김박(金博)의 딸이며, 아들은 정국공신(靖國功臣) 성몽정이다. 5촌 조카가 성승이고, 성승의 아들이 사육신 성삼문이다.
[활동 사항]
성담년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에 재주가 있었다. 아버지 성희가 김해로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국법상 자식과 서로 만날 수 없었으므로 성담년은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김해까지 걸어서 아버지를 따라갔다고 한다.
김해에 이르러 울부짖으며 밥을 빌어 조석 공양을 하였고, 성담년의 효성에 감동한 마을 유생들에 의하여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되어 참봉(參奉)[조선시대 여러 관아에 둔 종9품 벼슬]에 제수(除授)[추천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되기도 하였다.
1470년(성종 1)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77년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있으면서 임금으로부터 호피 1장을 하사(下賜)[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줌]받았고, 예문관수찬으로 있을 때 상서(上書)[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를 올리자 성종이 가상하게 여기며 글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사간원정언을 지낼 때 임사홍 문제에 대하여 의논한 바 있고, 불교의 폐해를 논하기도 하였다.
1479년 공조정랑과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시사(時事)[그 당시에 일어난 여러 사회 사건]에 대한 소(疏)[임금에게 올리던 글]를 올려 임금이 내약방(內藥房)의 약재를 하사하였다. 그 뒤 홍문관교리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성담년 사후 연산군 대에 대사간 이자견이 성담년에 대하여 매우 박식하였으나 음운(音韻)의 고저가 분명하지 못하였음에도 임금이 항상 진강(進講)[왕이나 동궁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던 일]하게 한 일화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성담년의 저서로 『정재집(靜齋集)』이 있다.
[묘소]
성담년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뒷산 절골 ‘성씨세장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83년(성종 14) 성담년이 별세한 후 순충보조공신가의대부사헌부대사헌창녕군(純忠輔祚功臣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昌寧君)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