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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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之産 |
영어공식명칭 | Jeong Jisan |
이칭/별칭 | 언평,포신,포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호 |
[정의]
조선 전기 동학사 숙모전의 전신인 초혼단을 만들고, 세종 지역에 은거한 충신이자 효자.
[가계]
정지산(鄭之産)[1396~1467]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평(彦平), 호는 포신(逋臣) 또는 포옹(逋翁)이다.
세조의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한 우의정 정분(鄭苯)의 양자이다. 양어머니는 원주변씨(原州邉氏)[1396~1467]이다.
[활동 사항]
1445년(세종 27)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450년에 호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현감으로 나갔다가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와 양아버지인 정분을 죽이자 벼슬을 버리고 전의현에 있는 주유산(周琉山)의 만의실(滿義室)[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영당리]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서 삶]하였다. 세조가 정지산의 재주를 아껴 정인지를 통하여 몇 번이나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양어머니 원주변씨를 지성으로 봉양하니 사람들이 정지산의 집을 가리켜 충효양문이라 하였다. 단종이 죽은 후 항상 영월 쪽을 향하여 앉아서 옛 임금을 사모하였다. 1459년(세조 5)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러 조상치, 조려, 성희, 송간, 이축 등과 삼은각 옆에 단종 및 단종을 위하다가 죽은 충신들의 넋을 품(品)자형 단을 만들어서 초혼하여 제사 지냈다. 숙모전(肅慕殿)의 전신인 초혼단(招魂壇)이 만들어졌다. 산채와 물고기를 캐고 잡아 숙모전의 제향(祭享)[제사]을 받들면서 「채미가(採薇歌)」와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충신단, 1797년에는 공주 요당서사(蓼塘書社)에 제향되었다. 1827년 동학서원(東鶴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1905년(광무 9) 효자로서 증직과 명정을 받았다. 1907년에 동학사의 숙모전이 창건되자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
현재 요당서사와 동학서원은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