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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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慶餘 |
영어공식명칭 | Gim Gyeongyeo |
이칭/별칭 | 유선,송애,문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596년(선조 29) - 김경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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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4년(인조 2) - 김경여 별좌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32년(인조 10) - 김경여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6년(인조 14) - 김경여 독전어사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49년(효종) - 김경여 대사간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50년(효종 1) - 김경여 충청도관찰사가 됨 |
몰년 시기/일시 | 1653년(효종 4) - 김경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01년(숙종 27) - 김경여 정절서원에 추배 |
출생지 | 김경여 출생지 - 대전광역시 송촌동 일대 |
거주|이주지 | 김경여 낙향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115 |
외가|처가 | 김경여 외가 -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
유배|이배지 | 김경여 유배지 -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 |
묘소|단소 | 김경여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 |
사당|배향지 | 정절서원 -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김씨 |
대표 관직 | 대사성|대사간|승지|충청도관찰사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문신.
[개설]
김경여(金慶餘)[1596~1653]의 자는 유선(由善), 호는 송애(松厓),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가 은거(隱居)[세상을 피해 숨어서 삶]하였다.
효종 즉위 후 벼슬에 나아가 정3품 벼슬의 대사성·대사간·승지가 되었고, 충청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경여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인품은 헌걸차고 풍채가 뛰어나 우뚝한 산악(山岳)과 같은 기상(氣象)이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다른 사람과 말할 적이면 음성과 얼굴빛은 즐겁게 하였지만 뜻을 세우기는 견고하고 곧게 하였으며, 자신의 몸가짐을 방정하고 엄격히 하였다. 또한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어 묵직하게 점잖고 단정하였으며, 씩씩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가하다고 허여(許與)[허락하여 줌]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함께 마음으로 칭찬하는 남의 말에 대해서는 마음을 기울려 정성을 보이며,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가계]
김경여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계림군파(鷄林君派)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된 김광유(金光裕)[1572~1596]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宋氏) 송남수[1537~1626]의 딸이다.
인조반정 1등 공신 연안이씨 이귀(李貴)의 사위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이었다.
[활동 사항]
김경여는 1624년(인조 2)에 별좌(別坐)가 되었으며, 그 뒤 직장(直長)·주부·부여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 10)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때 토목공사 중지를 청하였다가 성균관직강, 시강원사서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어 왕을 호종해서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대간에 임명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혔으나 부임하지 않아 금교역(金郊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648년(인조 26)년에는 승지로 발탁되는 등 이후 조정에서 관직에 임명하는 명이 있었지만 일체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인조 27)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간에 임명되어 육조소(六條疏)를 올렸으며, 청나라와 결탁한 김자점(金自點)[1588~1651]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김경여는 정3품 벼슬의 대사성·대사간·승지가 되었고, 1650년(효종 1)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력 배양에 힘썼다.
한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며 부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효종이 성군의 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일곱 가지를 짚은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집(金集)과 교유하였으며, 출처와 의리에 분명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경여의 저서로는 『송애집(松厓集)』이 있다
[묘소]
김경여의 묘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응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원종훈(原從勳)·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회덕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毁撤)[헐어서 없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