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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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聖周 |
영어공식명칭 | Im Seongju |
이칭/별칭 | 녹문,중사,녹문 선생,문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711년(숙종 37) - 임성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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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3년(영조 9) - 임성주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50년(영조 26) - 임성주 세자익위사세마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754년(영조 30) - 임성주 임실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58년(영조 34) - 임성주 공주의 녹문에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788년(정조 12) - 임성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45년(헌종 11) - 임성주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 |
출생지 | 임성주 출생지 - 충청북도 청풍 노은동 |
거주|이주지 | 임성주 은거지 - 충청남도 공주 |
묘소|단소 | 임성주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풍천 |
대표 관직 | 세자익위사세마|임실현감|태창주부|위솔|사옹원주부|양근군수|전주판관|영주군수 |
[정의]
조선 후기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명으로, 세종 지역에 묘를 쓴 학자.
[개설]
임성주(任聖周)[1711~1788]의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이다. 본관(本貫)은 풍천(豊川)이다. 18세기 조선의 저명한 유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불렸다.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학문을 익혔다.
만년인 1782년(정조 6)에 녹문동(鹿門洞)[지금의 공주]에 은거(隱居)[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강학에 힘써 ‘녹문선생’이라고 불렸다.
[가계]
임성주는 충청북도 청풍 노은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흥판관 임적(任適)[1685~1728]이며, 어머니는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5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임성주는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1750년(영조 26)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어 시직(侍直)에 승진하였으나 곧 사직하였으며, 1758년(영조 34) 공주의 녹문에 은거하였다.
1776년(영조 56) 정조 즉위 후 지방관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으로 내려와 은거하여 학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임성주는 이미 세 살 때 벽에 “임모(任某) 소자(少字) 사동(獅同)은 배 안에 500자가 있다.”라고 쓸 정도로 기억력과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전하여진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공부하여 김원행(金元行)[1702~1772], 민우수(閔遇洙)[1694~1756]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친분을 쌓았다.
임성주는 과거만을 위한 공부를 반대하여 “후세에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 오로지 과거로만 말미암으니 비록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같은 재능이 있어도 과거가 아니면 그 뜻을 행할 수 없다.”라 하고 대과(大科)를 포기한 후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성주는 첫째 성인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고, 둘째 천하인즉 인간사를 연구하는 일을 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정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자신의 학문적 관점을 정립하던 시기에 활동한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주자의 성리학적 관점과 다른 경학의 정립에 열중한 것과 달리 정통 성리학 관점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경학 연구와 주석에 열중하였다. 임성주가 저술한 『녹문집(鹿門集)』에 잘 드러나 있다.
한편 임성주는 주위의 청을 뿌리칠 수 없어서 22세 때인 1733년(영조 9)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가 대부분 지방관으로 벼슬 생활을 하였다. 세자의 보도(輔導)[잘 도와서 좋은 데로 이끎]를 두 번 맡기도 하였다. 1754년(영조 30)에는 임실현감(任實縣監)으로 부임하여 정사를 돌보았다. 보민청(補民廳)을 설치하여 난민(難民) 구호에 힘쓰는 한편 군자당(君子堂)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함으로써 학풍을 진작시켰다.
1758년(영조 34)에 공주의 녹문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1762년(영조 38) 동궁을 보위하는 직책을 제수(除授) 받아 책임을 맡았으나 1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태창주부(太倉主簿), 위수(衛率),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양근 군수(楊根郡守), 전주판관(全州判官), 영주군수(榮州郡守)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모두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1774년(영조 50)에 다시 녹문동으로 돌아와 성학(聖學)[성인(聖人)이 가르친 학문, 특히 유학]에 몰두하다가 잠시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하였으나 5년 뒤 다시 돌아와 1788년(정조 12) 3월 6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임성주는 일찍부터 성인(聖人)을 지향하는 학문관을 확립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明其理] ‘격물궁리(格物窮理)’와 유학의 도를 다하는[盡其道] ‘수기(修己)’라는 정통 성리학 문제에 천착하였으며, 진부한 명분에 얽매이거나 이론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한 현실 문제를 성리학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임성주는 학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시 낙론(洛論)의 대표 학자 도암 이재를 스승으로 모시고 과거(科擧)보다는 위기(爲己)의 학문을 닦을 것을 다짐하여 과거로 이름을 떨치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청에 따라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재에게 수학(修學)하며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730년(영조 6)에서 1734년(영조 10)까지 약 5년 동안 임성주가 이재와 함께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책인 『한천어록(寒泉語錄)』이 남아 있다.
『한천어록』은 학문하는 자세와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부분적 토론을 비롯하여 『심경(心經)』의 칠정(七情)에 관한 견해 등을 나눈 내용이다.
임성주는 심성론(心性論)에서 낙론(洛論)으로, 뒤에 호론(湖論)으로 기울었다.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초년에 주리설(主理說)을 배격하고 주기설(主氣說)을 주장하였지만 만년에는 양론을 절충해서 이(理)와 기(氣)의 이원적(二元的) 관념을 기(氣)의 일원적(一元的) 관념으로 통일하여 기원론(氣元論)을 발전시켰다.
이후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 중 한 사람으로 불렸다.
저서로는 『녹문집(鹿門集)』이 있다. 이 중에서 「녹려잡지(鹿廬雜識)」와 「산록(散錄)」 등이 중요하다.
[묘소]
임성주(任聖周)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에 있다. 본래 문의(文義) 덕지리(德芝里)에 묘소가 자리하였으나 공주 녹동으로 이장하였다가 1816년(순조 16)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상훈과 추모]
임성주는 1845년(헌종 11)에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大司憲兼成均館祭酒)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으며,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