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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643
한자 任憲晦
영어공식명칭 Im Heonhoe
이칭/별칭 전재,고산,희양재,명로,문경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1년(순조 11)연표보기 - 임헌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36년(헌종 2) - 임헌회 감시 초시에 합격됨
활동 시기/일시 1842년(헌종 8) - 임헌회 홍직필의 문인이 됨
활동 시기/일시 1864년(고종 1) - 임헌회 장령|집의|장악원정에 제수됨
활동 시기/일시 1865년(고종 2)연표보기 - 임헌회 호조참의가 됨
몰년 시기/일시 1876년(고종 13)연표보기 - 임헌회 사망
출생지 임헌회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군 직산면 산음리
외가|처가 임헌회 외가 - 충청남도 천안군 직산면 신음리
사당|배향지 숭덕사(덕성서원)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734-19 지도보기
성격 문인|학자
성별
본관 풍천
대표 관직 이조참판|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 호서지역 낙론의 대가 중 한명으로, 세종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

[개설]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이다. 유학의 거두로 유림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경서(經書)에 몰두하여 이름이 알려지면서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885년(고종 22) 유허지(遺虛址)[역사 기록만 남아 있고 유물이나 문화재가 전혀 없는 곳]인 방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유림의 발의로 ‘숭덕사(崇德祠)’라 이름 붙여진 사우(祠宇)[사당]를 창건하고 임헌회를 배향하였다.

[가계]

임헌회의 본관(本貫)은 풍천(豊川)이다. 아버지는 임천모(任天模)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익화(洪益和)의 딸이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1759~183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 등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임헌회는 1811년(순조 11) 천안 직산면 산음리에서 태어나 1871년(고종 8) 공주 삼기[연기군 남면 양화리]로 이거(移居)[본래 살던 집에서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김]하고, 2년 뒤인 1873년(고종 10)에는 공주 명강동[현 공주시 장기면 월송리]으로 옮겨 와 살았다.

임헌회는 1836년(헌종 2)에 감시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서 떨어지자 송치규를 찾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842년(헌종 8)에는 홍직필의 제자가 되었다.

1858년(철종 9)에 조두순(趙斗淳)[1796~1870]이 “명거의 후예로서 효우를 힘써 행하면서 조용히 거처하며 평소 배양한 뜻을 지키고 있다.”고 하며 천거(薦擧)[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하여 효름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판부사 김좌근(金左根)[1797~1869]이 경술(經術)[경서에 관한 학문]과 행의(行誼)[행실이 올바르고 바른길을 취하여 행함]로 천거하여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軍資監正)[조선시대 초에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아 보던 정3품(正三品)의 관직] 등의 벼슬이 주어지기도 하였지만 또한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철종 12) 다시 조두순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지만 역시 소(疏)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에 장령·집의·장악원정 등에 제수(除授)[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祭享)[제사]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고 한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 좨주(祭酒)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 묻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877년(고종 14)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임헌회는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일찍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즉 성리학에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인 주기파(主氣派)에 속하였다.

임헌회의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이항로(李恒老)[1792~1868] 문하의 김평묵(金平默)[1819~1891]과 대립하게 되었다.

임헌회와 김평묵은 1862년(철종 13) 서로의 학설에 대한 타당성을 주장하는 서신을 보내며 성리설에 대하여 논쟁하기도 하였다.

임헌회는 천주학을 극력 배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전재문집(全齋文集)』 20권과 『고산문집(鼓山文集)』, 『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임헌회는 1876년(고종 13) 사망한 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奏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하던 일]으로 내부대신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고, 연기의 숭덕사(崇德祠)[현 덕성서원]에 봉향(奉享)되었다.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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