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48 |
---|---|
한자 | 崔重龍 |
영어공식명칭 | Choi Jungryong |
이칭/별칭 | 운경,해동대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경희 |
출생 시기/일시 | 1543년(중종 38) - 최중룡 출생 |
---|---|
몰년 시기/일시 | 1575년(선조 8) - 최중룡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11월 04일 - 연기 봉산동 향나무 |
출생지 | 최중룡 출생지 - 서울 종로5가 효제동 |
거주|이주지 | 최중룡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강화 |
대표 관직|경력 | 형조참의 |
[정의]
조선 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효자.
[개설]
최중룡(崔重龍)[1543~1575]의 자는 운경(雲卿)으로 강화최씨(江華崔氏) 집안에 효의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이다.
중국에서 효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순임금과 무왕, 주공의 이름을 본따 해동대순(海東大舜)이라 불렸다.
봉산리에 입향한 최완(崔浣)[1510~1570]의 아들이며, 천연기념물 제321호로 지정된 연기 봉산동 향나무를 심은 인물이다.
[가계]
강화최씨 제정공파 후손으로, 15세손 최완과 풍양조씨(豊壤趙氏) 조당(趙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화최씨는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본래 서울 의동에 세거하였으나 최완이 말년에 연기로 낙향하며 자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활동 사항]
최중룡은 강화최씨 집안에서 효의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로, 조선 중중 때 아버지 최완이 조치원읍 봉산리로 낙향하여 살다가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러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어린 나이임에도 효성이 지극하여 최중룡의 사후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다.
아버지 최중룡의 모습 때문인지 아들 최회(崔澮)[1563~1621] 또한 효성을 본받아 효행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특히 최중룡은 약관(弱冠)[스무 살]의 나이에 현재의 봉산리 중뜸 마을 입구에 본인의 집안에서 효자와 열부가 많이 나기를 기원하며 향나무를 심었으며, 향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무성하게 되면 문호가 빛이 나고 효열이 속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극한 효성 이야기 때문인지 400여 년간 나무가 번창하였고, 그동안 최중룡의 예언대로 강화최씨 집안에서는 8대에 걸쳐 15명의 효열(孝烈)을 배출하게 되었다.
15효열(孝烈)은 최중룡·최회를 비롯한 10명의 효자와 5명의 열부이며, 관련 유물들이 아직도 봉산리에 남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연기 봉산동 향나무를 자단향(紫檀香)나무 또는 대순향수(大舜香樹)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중룡이 심은 연기 봉산동 향나무는 1982년 11월 4일 천연기념물 제32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최중룡은 지극한 효성으로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홍신민(洪信民)이 찬(讚)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