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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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慤 |
영어공식명칭 | Yun Gak |
이칭/별칭 | 여성,충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665년(현종 6) - 윤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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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9년(숙종 25) - 윤각 무과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숙종 38) - 윤각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720년(경종 즉위) - 윤각 병조참판 |
몰년 시기/일시 | 1724년(경종 4) - 윤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25년(영조 1) - 윤각 신원됨 |
추모 시기/일시 | 1725년(영조 1) - 윤각 병조참판으로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741년(영조 17) - 윤각 다시 증직됨 |
추모 시기/일시 | 1783년(정조 7) - 윤각 시호를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784년(정조 8) - 윤각 왕이 예관을 보내 치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27년(영조 3) - 증직 철회 |
묘소|단소 | 윤각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 260-109 |
사당|배향지 | 요당서사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
사당|배향지 | 열녀 광주김씨 정려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66-2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안 |
대표 관직 | 총융사|병마절도사|전라도수군절도사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에 묘를 쓴 무신.
[개설]
윤각(尹慤)[1665~1724]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여성(汝誠)이다. 비변사낭관, 도총부도사, 초계군수, 전주영장,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백두산 경계를 사정(査定)[조사하거나 심사하여 결정함]하고, 백두산 남쪽 산천의 형태를 그려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병조참판과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가 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그 후 영조가 즉위하면서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풂]되었다.
[가계]
윤각의 아버지는 진사 윤익상(尹翊商)이다. 윤각의 형은 함안윤씨 공주 입향조인 윤원(尹愿)이다. 첫 번째 부인은 완산이씨이다. 재취 광주김씨는 진사 김명뢰(金命賚)의 딸이다. 윤각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윤각은 1699년(숙종 2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전주영장을 거쳐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711년(숙종 37) 해안의 도적들이 제멋대로 날뛰자 금위중군(禁衛中軍)으로 이들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웠다.
1712년(숙종 38)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청나라 사신과 함께 백두산 경계를 조사하여 백두산 남쪽의 지형을 그려서 바쳤다.
1720년(경종 즉위) 병조참판에 전임되고, 이어 3도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조선시대에 둔 총융청의 으뜸 벼슬]가 되었다.
윤각은 함안윤씨 인물 중 조선시대 역대 고위급 군(軍) 지휘관 인명록인 『장신록(將臣錄)』에도 기록되어 있다.
윤각은 무신으로서 활약상이 뛰어났지만 형 윤원과 더불어 정치색이 노론이었으므로 정치적 시련을 피할 수 없었다.
윤각은 신임사화(申壬士禍)[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삼화(三和)에 유배되었고, 1724년 봄에 사망하였다.
[묘소]
윤각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에 초분(草墳)[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1~3년 동안 관을 돌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 두는 매장법]되어 있었으나 1827년(순조 27) 연동면 합강리로 이폄(移窆)[옮겨서 매장하다]하였다.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함에 따라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 260-109번지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윤각에 대한 신원 회복은 영조 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725년 3월에 윤각이 신원되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죽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주던 일]되었다.
그러나 1727년 다시 정권이 소론에 넘어가는 정미환국(丁未換局)[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이 철회되었고, 윤각의 정치적 시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1741년(영조 17) 임인옥(壬寅獄)은 무옥이므로 피화자는 신원한다는 명이 있자 윤각의 증직(贈職)이 다시 회복되었다.
이후 1783년(정조 7)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받았고, 1784년에는 왕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였다.
1824년(순조 24)에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요당서사(蓼塘書社)에 형 윤원과 함께 추배되었다.
윤각의 사당인 충민사와 아내인 광주김씨의 정려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 있다. 윤각 처 광주김씨 정려는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