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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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秀俊 |
영어공식명칭 | Im Sujun |
이칭/별칭 | 사민,소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월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철원 |
출생 시기/일시 | 1810년(순조 10) - 임수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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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75년(고종 12) - 임수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84년(고종 21) - 임수준 사후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증직 |
추모 시기/일시 | 1904년 - 임수준 사후 장예원에 청하여 정려 명을 받고 정문 건립 |
출생지 | 임수준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월산리 |
묘소|단소 | 효자 임수준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664-194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부안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효자.
[가계]
임수준(林秀俊)[1810~1875]은 본관이 부안이고 자는 사민(士民), 호는 소재(素齋)이다.
[활동 사항]
임수준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상복을 입고 죽으로 연명하였으며,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았다.
임수준은 학문도 뛰어나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사직 후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가뭄이 극심하여 난민이 발생하자 임수준은 쌀 100가마를 풀어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임수준이 죽은 후 유학 이봉선(李鳳善) 등이 임수준의 효행 사실을 상신(上申)[윗사람이나 관청 등에 일에 대한 의견이나 사정 따위를 말이나 글로 보고 하는 것]하여 1884년(고종 21) 조정에서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을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하였다.
1904년 또 한 번 고을 선비들이 장예원(掌隷院)[조선시대에 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3품 관청]에 청하여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받아 유생들이 주관하여 정문을 건립하였다.
효자 임수준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