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80 |
---|---|
한자 | 金震敞妻羅州羅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철원 |
추모 시기/일시 | 1676년(숙종 2) - 김진창 처 나주나씨 정려 건립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06년(숙종 32) - 열녀 나주나씨 정려 1차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6년 - 열녀 나주나씨 정려 2차 중수 |
묘소|단소 | 김진창 처 나주나씨 묘소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 남포 |
사당|배향지 | 열녀 나주나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보덕리 |
성격 | 열녀 |
성별 | 여 |
본관 | 나주 |
[정의]
조선시대 세종 지역 출신의 열녀.
[개설]
나주나씨는 김진창(金震敞)의 처로, 남편이 병들자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였으나 죽고 말았다. 사별 후 나씨는 시부모에게 극진히 효성을 다하면서 어린 자식을 양육하였다. 시부모가 노환으로 숨지자 뒤를 따라 죽으니 동네 사람들이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명 받은 효열부이다.
[가계]
아버지는 나응수(羅應壽)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활동 사항]
나주나씨는 강릉 사람 김진창에게 출가한 뒤 효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고, 부부간에는 금슬이 남달리 좋았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남편이 병을 얻었는데 나씨의 지극한 간병에도 백약이 무효였다. 그렇게 수년이 지난 후 남편이 죽었는데 나씨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소중하다는 생각에 어린 자식들을 길러 가며 시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시부모도 노환으로 모두 숨을 거두자 삼년상을 치른 후 시부모 뒤를 따라 죽었다. 나씨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효열의 행적을 조정에 알려 1676년(숙종 2)에 정려를 명받고 건립하였다.
[묘소]
나주나씨의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람리 남포에 아들의 묘소와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676년(숙종 2) 정려를 건립한 후 1706년(숙종 32)에 1차로 중수하고 1976년 다시 중수를 하였다. 열녀 나주나씨 정려는 2001년 5월 31일 연기군 향토유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2호로 재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