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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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濟鼎 |
영어공식명칭 | Gim Jejeong |
이칭/별칭 | 첨중,충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달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578년(선조 11) - 김제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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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5년(선조 37) - 무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인조 2) - 진주방어사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인조 5) - 인산방어사가 됨 |
몰년 시기/일시 | 1627년(인조 5) - 김제정 사망 |
몰년 시기/일시 | 1627년(인조 5) - 병조참의로 추증됨 |
추모 시기/일시 | 1774년(영조 50) - 김제정 정려를 명정 받음 |
출생지 | 김제정 출생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양곡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인산방어사|병조참의 |
[정의]
조선 후기 세종 지역 출신의 무신.
[개설]
김제정(金濟鼎)[1578~1627]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첨중(僉中)이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강홍립(姜弘立)[1560~1627]과 김경서(金景瑞)[1564~1624]가 싸우지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김제정이 대신 인산(麟山)방어사로 싸우다가 순절(殉節)[충절(忠節)이나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하였다.
[가계]
김제정의 할아버지는 목사 김사철(金師哲)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유(金鏐)이다.
전의 지역 안동김씨는 대부분이 고려 후기 무신이자 정치가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후손들이다.
이 중 김제정의 후손들은 주로 전의면 달전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활동 사항]
김제정은 1605년(선조 38)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직에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주(晉州)방어사를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홍립과 김경서가 싸우지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대신 인산방어사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1627년(인조 5) 예관을 보내어 김제정의 제사를 치르게 하였고, 병조참의의 벼슬을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높여 주던 일]하였다.
이와 함께 왕이 하교(下敎)[임금이 명령을 내림]하여 ‘호란에 순절한 자의 부모와 처자에게 미찬(米饌)[쌀과 반찬]을 하사하여 공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하며 제사에 쓰일 토지도 하사(下賜)하였다.
김제정의 아들인 김기(金基)도 부친이 순절한 원수를 갚고자 병자호란에 적과 싸우다가 1627년 검천의 고치에서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제정의 순절한 행적을 인정받아 1627년(인조 5)에는 병조참의 벼슬을 증직 받았다. 이와 함께 부모와 처자에게는 쌀과 콩 등을 하사하였으며, 깊은 애도와 제사에 쓰일 토지 또한 하사되었다.
그 후 영조 때 ‘충장’이란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가 내려졌다.
1774년(영조 50)에는 같은 충신인 남이흥과 이완이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를 받은 것과 다르게 김제정만이 누락되어 한탄스럽다는 김제정의 7세손 김노찬(金魯粲) 등의 상언(上言)과 우승지 조영진(趙英鎭)의 상소(上疏)[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에 의하여 정려를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받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