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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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基民 |
영어공식명칭 | Jang Gim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3월 17일 - 장기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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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21년 02월 24일 - 장기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장기민에게 건국훈 애족장이 추서됨 |
출생지 | 장기민 출생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
활동지 | 횃불독립만세운동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
묘소 | 장기민 묘 -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81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세종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장기민은 옛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장기민(張基民)[1897~1921]은 1919년 3월 28일 옛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23일 이후 연기 지역과 인근 청주 지역 면민들이 대대적으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연기군 동면에서는 3월 26일 응암리, 3월 27일 예양리·노송리·송용리 등 6곳에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송용리 주민들은 청주 강내 면민들과 연락하여 연합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지는 횃불독립만세운동에 일제는 연기군수를 시켜 군내를 순회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제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연기군수는 3월 28일 동면 면사무소에 면민들을 집합시켜서 면민들을 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군수의 친일적인 연설을 듣고 있던 장기민은 장홍진(張弘鎭)[1899~1938]과 함께 ‘한국 민족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군수의 연설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동면 면장의 제지로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하였다. 송용리로 돌아온 장기민과 장홍진은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기민은 친일적인 군수에게 항거하고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묘소]
장기민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인하여 1921년 2월 24일 숨졌으며,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치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장기민의 공적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 애족장을 추서(追敍)[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