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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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燕西孝橋碑 |
이칭/별칭 | 세종 기룡리 효교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기룡리 713-5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79년 - 홍연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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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47년 - 홍연경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73년(영조 49) - 연서 효교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7월 26일 - 연서 효교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지정 |
이전 시기/일시 | 1987년 - 연서 효교비 이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96년 - 연서 효교비 중수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2년 7월 1일 - 연서 효교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지정 해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2월 31일 - 연서 효교비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연서 효교비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연서 효교비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기룡리 713-55 |
원소재지 | 연서 효교비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기룡리 713-55 |
성격 | 비석 |
양식 | 옥개형 이수 |
관련 인물 | 홍연경|홍정설|홍우적|홍우평|홍우구|홍방만|홍득후|홍득일|홍상직 |
재질 | 화강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0㎝[높이]|90㎝[너비]|65㎝[두께] |
소유자 | 남양홍씨 문중 |
관리자 | 남양홍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기룡리에 있는 조선 후기 남양홍씨 5대 9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개설]
연서 효교비는 조선시대 5대에 걸쳐 9명의 효자가 나온 남양홍씨 집안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들 9명의 효자들은 홍연경(洪延慶)[1579~1647]과 아들 홍정설(洪廷卨)[1615~1671], 손자 홍우적(洪禹績)[1634~1701]·홍우평(洪禹平)[1640~1699]·홍우구(洪禹九)[1646~1698], 증손 홍방만[1665~1719], 현손 홍득후(洪得厚)[1689~1764]와 홍득일(洪得一)[1687~1736], 5세손 홍상직(洪相直)[1723~1773] 등이다.
1772년(영조 48)에 ‘효교동(孝橋洞)’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연서 효교비는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73년(영조 49)에 건립한 것이다.
연서 효교비 사면에 새겨진 비문에는 홍현(洪鉉)의 손자 홍상직이 대사간(大司諫)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을 때 영조로부터 특별히 ‘효교동’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홍상직의 아버지 홍득후와 홍상직에 관한 기록인 사록(私錄)에 의하면 1772년 2월 7일 정원일기초(廷院日記抄)에 임금이 홍상직이 가선(嘉善)에 이른 지 오래이나 입조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도승지(都承旨) 이석상(李錫祥)이 홍상직의 선조 묘가 연기에 있는 바 성묘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며 홍상직의 선조들을 5세 7효라고 소개하였고, 이 말을 들은 영조가 남양홍씨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효교동’이라는 동명을 특별히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체적인 진위 여부를 떠나 연기 지역에서 남양홍씨 가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건립 경위]
연서 효교비는 본래 지금의 위치보다 높은 마룡동 마을 입구의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었지만 1987년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96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현재 연서 효교비 주위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위치]
연서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1.2㎞ 정도 가면 신대리와 기룡리의 중간쯤에 새터말이 있다. 연서 효교비는 새터말 입구 도로변에 있다.
[형태]
연서 효교비는 효교비각 내에 있다. 효교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면에 홍살을 두르고 있다. 원형 초석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고, 양쪽에 방풍막이 있다.
효교비각 오른쪽으로 문중에서 건립한 효교정(孝橋亭)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연서 효교비 전면에 ‘孝橋 南陽洪氏世以孝傳故 英廟四十九年壬辰特 賜改洞名’이라고 쓰여 있다.
[현황]
화강석재로 만든 너비 90㎝, 높이 30㎝, 두께 65㎝ 크기의 방형대좌 위에 너비 46㎝, 높이 122㎝, 두께 21.5㎝ 크기의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신 상단부에는 너비 81㎝, 높이 34㎝, 두께 59㎝의 옥개형 이수를 올렸다.
효교비각에는 ‘孝橋碑閣’이라고 쓴 현판이 전면에 게재되어 있다. 오른쪽의 효교정에는 ‘孝橋亭’이라는 현판과 함께 1772년 2월 7일 정원일기초(廷院日記抄)의 원문과 번역문을 각각 담은 현판이 게재되어 있다.
연서 효교비는 1984년 7월 26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7월 1일 해지되고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연기 지역에서 남양홍씨는 ‘천홍만림(千洪萬林)’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지위를 확보해 나갔다. 이는 1645년에 작성된 연기향안 좌목에 홍연경을 비롯한 입향조 순손(順孫)[조부모를 잘 받들어 모시는 손자]의 현손들과 홍연경의 아들 홍정설을 위시한 5세손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으며, 시대가 뒤로 오면서 향안에 등재된 홍씨 수가 상당히 증가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연서 효교비도 이러한 홍씨 집안의 성장 과정을 보여 주는 사례의 하나로, 연기 지역 내에서 남양홍씨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