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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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徵夏遺墟碑 |
이칭/별칭 | 서재 임선생 적려유허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종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유배객 임징하의 유허비.
[개설]
임징하(任徵夏)[1687~1730]는 본관이 풍천이며, 자는 성능(聖能), 호는 서재(西齋)이다. 호조판서 김진구(金鎭龜)의 둘째 사위였다.
사헌부 장령으로 상소(上疏)를 올려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小論)의 제거를 주장하다가 1726년(영조 2) 2월 24일 평안도 순안(順安)으로 유배되었다가 1727년(영조 3) 제주로 이배되었다. 별도포[현 제주시 화북포]로 입도하여 8월 21일 감산촌 고재영(高齋英)의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다음 해인 1728년 8월 23일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역모죄로 국문 당한 후 1730년(영조 6) 옥사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원년)에 사면되어 관직이 복구되었고, 1809년(순조 9)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시호 충헌(忠憲)이 내려졌다.
[건립 경위]
임징하 유허비는 1862년(철종 13)에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임징하의 충절과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임헌대는 임징하의 5대손이다.
[위치]
처음에는 속칭 '묵은터'인 임징하 적거지[당시 집주인은 고재영] 앞에 세워졌는데, 이후 감산리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300m쯤 돌아들어간 감산중로 23-8번지 개인 집 입구로 옮겨지고, 1997년에는 다시 안덕계곡 매표소 앞으로 옮겨졌다가 2004년 현 위치인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감산리복지회관 경내로 옮겨졌다.
[형태]
크기는 비신의 높이가 140㎝, 너비 64㎝, 두께 21㎝이며 재질은 제주산 조면암이다. 또한 같은 재질의 관석(冠石)이 있다.
[금석문]
임징하 유허비는 임징하의 5대손인 경영관(經筵官) 임헌회(壬憲晦)가 글을 짓고 제주목사 임헌대(任憲大)가 글씨를 썼다.
1. 전면
서재임선생적려유허비(西齋任先生謫廬遺虛碑)
2. 후면
오호(嗚呼), 차제주지대정현감산촌자(此濟州之大靜縣柑山村者), 즉아오대숙조서재선생적려유지야(卽我五代叔祖西齋先生謫廬遺址也). 선생(先生), 성임씨위징하자성능서하인서재기호야(姓任氏諱徵夏字聖能西河人西齋其號也). 숙묘정묘생(肅廟丁卯生), 계사사마양시갑오문과(癸巳司馬兩試甲午文科). 영묘병오(英廟丙午), 이장령소진신임의리(以掌令疏陳辛壬義理), 변 성무토(辨 聖誣討), 난적위흉당소구서순안(亂賊爲凶黨所構竄順安). 정미천극우차(丁未栫棘于此), 기옥주고제영야(其屋主高濟英也). 무신체왕부(戊申逮 王府), 비경독초(備經毒楚), 경이유술칠월이십사일졸(竟以庚戌七月二十四日卒). 정묘병신(正廟丙申), 신설단서(伸雪丹書), 순묘기사(純廟己巳), 특증이조참판(特贈吏曹參判). 오호(嗚呼), 선생정충대절(先生精忠大節), 당여천양(當與天壤), 동기부륵(同其不泐), 이유차지내재절해중(而惟此地乃在絶海中), 역치구이미소(易致久而迷所). 선생몰후백삼십유여년(先生沒後百三十有餘年), 오대손헌대위본주목(五代孫憲大爲本州牧), 위시지구(爲是之懼), 건패이표지(建碑而表之), 속헌회식기전말(屬憲晦識其顚末). 오호(嗚呼), 시선생지피장야(始先生之被拿也), 유시왈(有詩曰), 독성현서소학하사(讀聖賢書所學何事), 요사차심부앙무괴(要使此心俯仰無愧), 종고이래인수불사(從古以來人誰不死), 귤임재방백세가사(橘林在傍百世可俟). 사족이지선생(斯足以知先生), 인병기지(因幷記之). 백세지하과차자(百世之下過此者), 상유감모이치자사(尙有感慕而致敬者矣).
숭정사임술사월일종오대손경연관헌회근술(崇禎四壬戌四月日從五代孫經筵官憲晦謹述) 오대통정대부행제주목사헌대근서(五代通政大夫行濟州牧使憲大謹書)
아! 이 제주의 대정현 감산촌은 바로 나의 5대조 숙조(叔祖) 서재(西齋) 선생이 유배 와서 살았던 옛터이다. 선생은 성이 임(任)씨요 이름은 징하(徵夏), 자는 성능(聖能)이다. 서하(西河) 사람으로 서재는 그의 호이다. 1687년(숙종 13)에 태어나 1713년에 사마(司馬) 양 시험과 1714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1726년(영조 2)에 장령(掌令)으로서 소(疏)를 내어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의리를 진술하고 성신(聖臣)에 대한 무고를 변명하고 난적을 토벌하도록 하였으나 흉악한 무리들에게 모함을 받아 순안(順安)으로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에 이곳에 가시울타리를 쳤으니 그 집주인이 고재영(高齋英)이다. 1728년(영조 4)에 의금부에 체포되어 갖은 혹독한 고문을 거쳐 마침내 1730년(영조 6) 7월 24일에 돌아가셨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단서(丹書)로 억울함이 신원되었고 1809년(순조 9)에 특별히 이조참판이 증직되었다.
아, 선생의 맑은 충절과 큰 절의는 천지와 더불어 아마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하리라. 생각건대 이 땅은 바다로 막힌 가운데 있는데다 세월이 바뀌어 오래되면 장소도 희미해질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130여 년이 되었다. 5대손 헌대(憲大)가 제주목사가 되었으므로 이렇게 됨이 송구하여 비를 세워 표시를 하고 친족인 헌회(憲晦)가 그 전말을 적는다. 아, 처음 선생이 체포될 때 시를 지어 말하기를,
성현의 글 읽고 배워 무슨 일을 하리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럼이 없게 하였네
예부터 지금까지 아니 죽은 이 누구던가
귤나무 숲 옆에서 백세(百世)를 기다리리
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충분히 선생을 알 수 있기에 아울러 기록한다. 백세 후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여전히 추모하는 느낌을 가지고 존경하게 되리라.
숭정 기원후 네 번째 임술년(1862년 철종 13) 4월 일 종5대손 경연관 헌회가 삼가 짓고, 5대손 통정대부 행제주목사 헌대가 삼가 쓰다.
[현황]
임징하 유허비는 현재 감산리 복지회관 경내에 서향을 하여 서 있으며, 보존상태가 대체로 양호하고 글씨의 마모도 심하지 않아 육안으로도 판독이 가능하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제주도는 중앙의 많은 인사들이 적객(謫客)으로 머물다 간 유배지이다. 임징하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임징하 유허비는 적객 임징하의 제주도 대정현에서의 자취뿐만 아니라 영조에서 순조에 이르는 조선 후기 중앙정계 집권세력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