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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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翠谷里 |
영어공식명칭 | Chwigok-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취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윤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취와동(翠臥洞)과 침곡동(砧谷洞)에서 한 자씩을 따와 ‘취곡(翠谷)’이라 이름하였다. 취곡1리 자연 마을에는 취와대(翠臥臺)가 있고, 취곡2리 자연 마을에는 침곡(砧谷) 마을이 있다.
취곡리의 가장 동쪽에 있는 취와대는 봉암천이 만든 평야와 마을 뒤 구릉을 배경으로 한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마을이 처음 조성될 때 앞산에 푸르고 검은 바위가 있고 마을이 개구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 ‘취와(翠蛙)’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취와대의 원음(原音)은 ‘치바대’에서 온 듯하고 위쪽을 ‘치’라 하고 들판을 ‘바대’라 하는 뜻의 합성어로, ‘천변(川邊)의 위쪽 들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침곡 마을은 방아실이라고도 불리며, 마을 뒷산인 성산[383.4m]의 남쪽에 있다. 마을이 능선으로 둘러싸여 과거부터 난세에 은사(隱士)들이 머물거나 풍월을 즐기는 명사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이규문(李奎文)이 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덕산 이씨(德山李氏) 집성촌이 되었다. 방아실은 고호박이라는 사람이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고[방아 찧는 절구공이]’와 ‘호박’은 있으나 방앗간이 없다 하여 방아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산남방(山南坊)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06년 산남면과 오도면을 오산면으로 통합하고, 도남면과 화곡면을 남곡면으로 통합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취와동, 침곡동, 서촌동 일부와 초곡면의 송포동 일부를 합하여 취곡동이라 하고 오산면과 남곡면을 병합한 선남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면서 선남면 취곡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성산[383.4m]의 능선에서 발원하는 취곡천이 취곡2리를 지나 남쪽으로 흐르며 취곡1리 취와대 마을에서 봉암천(鳳巖川)과 만난다. 취곡천은 숲안들이라 불리는 취곡2리 침곡 마을 부근에서 곡저 평야를 만들고, 취곡1리의 봉암천과 취곡천이 합류하는 곳에 숲밀들, 위중심들, 중심들, 해평이들과 같은 넓은 평야를 만들었다. 취곡리에는 취곡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 하천이나 봉암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 하천이 많으며 골짜기의 형태를 보인다. 이러한 골짜기가 취곡1리의 갈밀골, 곱은골, 빈속골, 오록골과 취곡2리의 붕골, 성지골, 이재골이다. 취곡리에는 낭심 바위라는 남근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는데, 기반암과 분리되어 그 위에 암괴들이 쌓인 토르(Tor) 지형이다.
[현황]
취곡리는 선남면 소재지에서 명관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2.5㎞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며, 동서남북을 선남면의 동암리와 유서리, 명포리, 신부리가 둘러싸고 있다. 2020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2.767㎢이며, 취곡1리와 취곡2리 2개 행정리에 110가구, 186명[남 104명, 여 8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취곡리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중부 내륙 고속 도로가 지나가며, 동쪽 동암리 경계부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며 공단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 선사 시대 유물인 취곡리 고인돌군과 삼국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취곡리 고분군(翠谷里古墳群)이 있고, 서암재(棲岩齋)와 흥선재(興善齋), 이이당(以以堂) 등의 재사와 재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