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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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牧 |
영어공식명칭 | Seongju-mok |
이칭/별칭 | 경산부(京山府),성주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1308년부터 1895년까지 성주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고려 시대에 성주 지역은 940년(태조 23)부터 주로 경산부(京山府)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성주목’으로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성주’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로 성주목은 행정 구역과 이름이 몇 차례 바뀌기도 했지만, 1895년(고종 32) 칙령 제101호로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하여 성주군이라 개칭할 때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성주 지역 행정 구역의 명칭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원나라의 간섭기인 1308년 원나라 행정 체제를 고려하여 고려의 행정 체제를 개편하면서, 경산부에서 성주목으로 개편되었다. 이어 2년 만인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경산부로 환원되었다가, 1401년(태종 1)에 다시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관련 기록]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1], 『경산지(京山志)』[1677], 『여지도서(輿地圖書)』[1759],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 『성주목읍지(星州牧邑誌)』[1832],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등에 관련 기록이 있다.
[내용]
고려 시대에는 1308년부터 1310년까지 성주목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내내 경산부로 불리었다. 성주목으로 실질적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401년이며, 이후로 조선 시대 내내 성주목으로 불리었다.
[변천]
1308년 성주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하면서 성주목이 되었다가, 1310년 경산부로 환원되었다. 1401년에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加利縣)·팔거현(八莒縣)·화원현(花園縣)을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역모 사건이 몇 차례 발생하여 성주목의 행정 구역명을 변경하는 원인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7) 8월에 주민 이창록(李昌祿)이 왕의 비행과 조정을 비방한 사건으로 경상감사의 장계에 따라 목에서 강등되어 고령현에 합쳐졌고, 주민 모두가 금고형(禁錮刑)에 처해졌다. 2년 뒤에는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며 고령현에서 분리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목(牧)으로 승격되었으나, 1631년(인조 9) 2월에 일어난 권대진(權大進)의 모역 사건에 성주인 박소(朴訴)가 연루되어 다시 성주현으로 강등되었다. 10년 후인 1640년(인조 18)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나, 5년 후인 1644년(인조 22)에 다시 모역 사건이 일어나 성주현으로 강등되었다. 10년 후인 1654년(효종 4)에 다시 목으로 복원되었다.
1736년(영조 12)에 관아 소속의 관노(官奴)·관비(官婢)·읍교(邑校)가 목사 이성제를 독살한 사건이 일어나 10월에 다시 성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인 1745년(영조 21)에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다. 또한 그동안 속현이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이 대구부(大丘府)에 각각 이속되어 가리현만 남게 되었다. 1895년 칙령 제101호로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성주군이라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성주목은 조선 시대에 상주, 경주, 진주, 안동과 함께 경상도 5대 도시 중 하나였고, 가장 번영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많은 성씨의 본관이 되었던 지역으로서, 현재의 성주보다 훨씬 넓은 행정 구역을 가졌다. 그러나 많은 정치 사회적 사건들이 발생하여 읍명(邑名)의 강등과 복귀가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