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515
한자 陶隱先生文集
영어공식명칭 Collected Works of Lee Sung-in
이칭/별칭 『도은집(陶隱集)』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406년연표보기 - 『도은선생문집』 변계량이 편차
간행 시기/일시 1406년 - 『도은선생문집』 초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중종~명종 연간 - 『도은선생문집』 중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1589년 무렵 - 『도은선생문집』 중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효종~숙종 연간 - 『도은선생문집』 중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1863년 - 『도은선생문집』 중간본 간행
간행 시기/일시 1961년 - 『도은선생문집』 중간본 간행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성격 시문집
저자 이숭인(李崇仁)
편자 변계량(卞季良)
간행자 변계량(卞季良)
권책 5권 2책[시집 3권·문집 2권]
행자 9행 15자
규격 25.5×16.1㎝
어미 상하흑구내향흑어미(上下黑口內向黑魚尾)
권수제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판심제 시(詩)[권1~3]·문(文)[권4~5]

[정의]

1406년 간행된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이숭인의 문집.

[저자]

이숭인(李崇仁)[1347~1392]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으로, 1347년(충목왕 3)에 경산부(京山府) 용산리(龍山里)[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14세 때인 1360년(공민왕 9)에는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그리고 16세 때인 1362년(공민왕 11)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20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주로 20대 초반에는 성균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사류(士類) 육성을 담당하였다. 그러면서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1318~1375]·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1338~1384]·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 등과 교유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사후에 친원파(親元派) 대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집권자의 미움을 받아 1375년(우왕 1)에 경산부(京山府)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약 2년 뒤인 1377년(우왕 3)에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부임하였으며,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긴 뒤에는 이인임(李仁任)[?~1388] 일파에 의해 문란해진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국의 현안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에는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중시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표문(表文) 작성을 통해 외교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위화도 회군이 일어남으로써, 급진 개혁파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차례 탄핵을 받은 뒤, 1389년(창왕 1)에 또다시 경산부에 유배되었다.

그 후 1391년(공양왕 3) 11월에 사면되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제수된 뒤, 정몽주·이색 등과 함께 『국조실록(國朝實錄)』을 수찬하였으나,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1367~1422]에 의해 암살되자,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황거정(黃居正)[?~?]에게 장살당하였다. 사후 14년 뒤인 1406년(태종 6)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태종의 명에 의해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도은선생문집(陶隱先生文集)』은 최소 10여 차례 이상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집(原集) 5권 2책으로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주로 이 원집의 내용이 다른 판본의 형태로 간행되곤 하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목차와 부록 2권이 더 첨가되기도 하였다. 판본을 계열화한다면, 권4에 실린 산문의 배열 순서에 따라 서로 다른 두 종의 판본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초간본은 1406년에 태종의 명으로 춘정 변계량이 편차(編次)하고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이 서문을 써서, 시집 3권, 문집 2권으로 만들어졌다. 목판본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반엽(半葉)이 11행 19자이며, 권수에 주탁(周倬)·정도전·권근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색·장부(張溥)·고손지(高巽志)의 발문이 있다. 그리고 중종~명종 연간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간본이 있는데, 이는 권책 및 간종은 초간본과 동일하나, 권4의 산문 배열 순서가 초간본과 상이하다. 또한 반엽이 9행 15자이고, 대부분의 시를 2구 1연으로 판각하였으며, 권수에 발문과 서문이 한꺼번에 실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후 간이(簡易) 최립(崔岦)[1539~1612]이 1589년(선조 22) 무렵에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있으면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활자를 이용하여 『도은시집』 몇 질을 인행하였다고 하나, 현재 해당 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란 이후의 판본으로는 효종~숙종 연간에 간행된 5권 2책의 목판본이 있다. 이 판본은 반엽이 12행 22자이며, 판본의 체제는 초간본과 동일한다. 또한 1863년(철종 14)에는 이숭인의 후손인 이준호(李俊浩)·이도복(李道復) 등이 연보(年譜) 및 행장(行狀)을 짓고 다른 문인들의 시문 가운데 이숭인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부록 2권을 만든 뒤, 원집 뒤에 이를 붙여 7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판본의 경우, 권수에 권근·오진영(吳震泳)의 서문이, 그리고 권말에 박의동(朴儀東)·이준호·민치량(閔致亮)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후 1961년에는 이숭인의 후손 이규형(李圭衡)이 여러 사서(史書)와 문집을 바탕으로 연보를 다시 만들고, 이숭인의 유문(遺文) 및 문헌에서 산견(散見)되는 이숭인의 행적을 모아 속집 2권을 만든 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이요정(二樂亭)에서 이를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어미(魚尾)는 상하흑구내향흑어미(上下黑口內向黑魚尾)이다. 반곽의 크기는 25.5×16.1㎝이며, 1면 9행에 1행의 자수는 15자이다. 권수제는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이고, 판심제는 권1~3의 경우 ‘시(詩)’, 권4~5의 경우 ‘문(文)’으로 되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도은선생문집』은 시집 3권, 문집 2권, 도합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에는 이색·장부·고손지의 발문 및 주탁·정도전·권근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3은 시집으로, 시체별(詩體別)로 시가 배열되어 있으므로, 작품 배열에 있어 창작 시기는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권1에는 사(辭) 1편, 고시(古詩) 30제, 권2에는 율시(律詩) 154제, 권3에는 절구(絶句) 152제가 배열되어 있다. 시 가운데는 송별시(送別詩), 증시(贈詩), 스님의 시권(詩卷)에 부친 시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두 차례 명나라를 오가면서 지은 사행시(使行詩)도 상당수 존재한다.

권4~5는 문집으로, 권4에는 기(記) 7편, 지(誌) 1편, 서(序) 12편 등 총 20편이 실려 있고, 권5에는 전(傳) 2편, 제후(題後) 3편, 의(議) 1편, 행장(行狀) 1편, 찬(讚) 1편, 자설(字說) 1편, 표(表) 17편, 전(箋) 5편 등 총 3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에는 송서(送序)와 시서(詩序)가 많이 실려 있고, 권5에서는 경산(京山)의 열녀에 대한 「배열부전(裵烈婦傳)」, 모친의 삶을 기록한 「선대부인행장(先大夫人行狀)」,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 보낸 표전(表箋) 등이 주목된다. 특히 「배열부전」은 경산부 출신인 열부 배씨가 1380년(우왕 6) 7월에 부인으로서의 열(烈)을 지키고자 왜적을 피해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왜적이 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이숭인은 ‘사람들이 항상 신하·자식·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큰 환란을 당해서는 이를 제대로 실천하는 이가 드물다’고 이야기하면서, 배씨의 열행을 칭송하였다.

[의의와 평가]

도은 이숭인의 개인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고려 말 지식인들의 인격과 풍모, 그리고 그들의 동향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저서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의 판본도 상당수 남아 있어, 문헌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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