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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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尙吉 |
영어공식명칭 | I Sanggil |
이칭/별칭 | 사우(士祐),동천(東川),만사(晩沙),충숙(忠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갑곤 |
[정의]
조선 후기 본관이 벽진인 문신.
[개설]
이상길 초상(李尙吉肖像)은 1984년 8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字)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만사(晩沙). 증조할아버지는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 이유번(李有蕃)이고, 할아버지는 덕천군수(德川郡守)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이희선(李喜善)이고, 어머니는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정환(丁煥)의 딸이다. 형은 이상철(李尙喆)이고, 동생은 이상급(李尙伋)이다. 세 형제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길(李尙吉)[1556~1637]은 한양 주자동(鑄字洞)[현 서울특별시 중구 주자동]에서 출생하였으나 외가인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성장하였다. 1585년(선조 18) 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한 후 감찰, 호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지제교, 예조좌랑 등을 거쳤다. 1594년(선조 27) 익산군수가 되어 치적을 크게 드러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광주목사로 재임 시에 치적이 뚜렷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02년(선조 35) 최영경(崔永慶)을 논죄한 일로 6년간 풍천(豊川)[현 황해남도 과일군]에 유배되었다. 1604년(선조 37) 봄 유배지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집에 있던 개가 산 꿩을 물어 와서 앞에 놓자 사람들이 하늘이 효성에 감응하였다고 여겼다. 1607년(선조 40)에 풀려나 회양부사, 안주목사를 거쳤다. 1615년(광해군 7) 호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최영경(崔永慶)의 일로 다시 파직된 후 노원(蘆原)[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은거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하지사(賀至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일행을 엄정하게 단속하여 명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이듬해 독운사(督運使)로 가도(椵島)에 웅거하던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보내어 구원하였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돌아가 은퇴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동부승지·병조 참의·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역적을 토멸한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진하였다. 그 뒤 예조참판, 전주부분을 거쳐 1632년(인조 10)에 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에 중추, 대사간, 한성좌우윤, 대사헌을 거쳐 1635년(인조 13)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자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고는 강화부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학문과 저술]
『동천집(東川集)』 6권 3책이 전한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16-1번지[중계로 57] 충숙공 이상길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강화도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