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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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海東 |
영어공식명칭 | Yeo Haedong |
이칭/별칭 | 사진(士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경남 |
출생 시기/일시 | 1893년 3월 3일 - 여해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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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8년 - 여해동 흠치교에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여해동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2월 31일 - 여해동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붙잡혀서 구류됨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4월 16일 - 여해동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7월 4일 - 여해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2년 - 여해동 건국 포장 추서 |
출생지 | 여해동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970 |
거주|이주지 | 여해동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활동지 | 여해동 활동지 - 경상남도 합천군 |
활동지 | 여해동 활동지 - 경상북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흠치교 화찰이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사진(士鎭). 1538년(중종 33)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여희림(呂希臨)의 15세손이며, 아버지는 여상록이다.
[활동 사항]
여해동(呂海東)[1893~1924]은 1893년 3월 3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리[현 수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음력 4월 이래 차경석(車京錫)이 사실상의 교주가 된 흠치교에 입교하여 교세 확장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2일에는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검거되었고, 이후로는 주로 흠치교 조직원으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1920년 음력 2월 흠치교의 60인 조장 채권회(蔡權會) 휘하에서 6인조의 조장 화찰이(火察異)에 임명되었고, 음력 12월까지 독립 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이범구(李範九)와 협의하여 경상남도 합천과 경상북도 고령·군위·선산·달성 등 여러 곳을 순회하며 주민들에게 흠치교 입교를 권유하였다.
그 결과 문진조(文鎭祚) 등 약 85명의 교도를 모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치성금(致誠金)의 형태로 15원씩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1921년 12월 31일 구류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1922년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안동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7월 4일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2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