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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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基東 |
영어공식명칭 | Yu Gid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유기동(柳基東)[1896~1924]은 1896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된 흥업단(興業團)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4년 봄 하얼빈[哈爾濱] 일본 총영사관 순사 부장 쿠니요시 세에보[國吉精保]와 형사 부장 마쓰시마[松島] 등이 독립 투사들을 함부로 해친다는 정보를 듣고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서로군정서원(西路軍政署員)인 김만수(金萬秀)·최병호(崔炳鎬) 등과 협조하였다.
1924년 4월 6일 김만수·최병호 등과 함께 하얼빈 18도가 평강리(18道街平康里)의 중국 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계획을 숙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 탐지되며 포위되었다. 순사 부장 쿠니요시가 밤 12시에 일경 10여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다가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일경은 동발잔 여관이 벽돌집이라서 쉽게 체포하지 못하였다. 일경은 4월 8일 오후까지 속수무책으로 포위만 하고 있다가. 중국 측에 강권하여 중국군 200여 명의 증원을 받아 항복을 권고하였다.
유기동은 “일본인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하면서 끝내 응하지 않았고, 일경은 같은 날 오후 1시경에 폭탄 10여 개를 투척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260발의 탄환을 퍼부으며 잔인하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1924년 4월 8일 유기동은 김만수·최병호 등과 함께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며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