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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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世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일환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 칠정(七井)이다.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이재(以載)이다. 큰아버지 장릉참봉 희재(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활동사항]
1652년(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평안도·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 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 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년 4월 대사간·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 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 뒤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
저서로는 『쌍백당집』이 있다.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추증]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