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431 |
---|---|
한자 | 具仁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은경 |
[정의]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하였던 무신이자 척신.
[개설]
구인후[1578~1658]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휘는 인후(仁垕),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어받은 김장생에게서 배웠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
[가계]
구인후는 능성군 구순(具淳)의 증손자이고,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손자이며, 능해군 구성(具宬)의 아들이다. 인조의 외종형이며, 모친은 별좌 정억령(鄭億齡)의 딸이다.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고원군수, 갑산부사, 선전관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정치에 불만을 품던 중에 반정 과정에 직접적인 참여를 못하였으나 모의에 참여한 공로로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한성부윤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었다. 이때 후금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 받았다. 이어 한성부윤과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수원부사로 부임하여 그 재직 중에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때 군대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시 인조가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에 들어가 산성 수비의 진영에 합세하였다. 당시 산성 내 군사의 수는 약 12,700여명 이었는데, 부장이란 직책을 부여받아 국왕을 호위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어영대장을 제수 받았다.
1644년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후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653년(효종 4) 우의정에 올랐으며, 1654년 처형당한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고 사형당한 김홍욱(金弘郁)을 옹호하다가 삭직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복관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정치에 불만을 품던 중에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과 더불어 반정을 모의하였다. 반정과정에 직접적인 참여를 못하였으나 모의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644년 어영대장으로서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을 적발,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