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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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平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창겸 |
[정의]
한강 유역에 있었던 역사지명.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대비하여 남쪽에 있는 특별한 도읍이라는 의미이다.
[설치]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정복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백제를 침공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쟁패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광개토왕 다음 왕인 장수왕 때였다. 장수왕은 그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왕도 한성을 포위하매 개로왕이 성문을 빠져 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 당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영토로 삼았다.
[변천]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잃어버린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하면서 국력회복에 힘썼다. 백제 성왕은 551년(성왕 29) 신라와 합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는데, 이때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의 한성과 남평양 등 6군(郡)을 점령하고,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한강 상류 유역 10군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그동안 숙원이던 한강 유역을 되찾게 되어 지금의 서울 지방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으며, 따라서 북한성 또는 한성의 이름이 회복된 반면에 남평양이란 이름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