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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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浦佛敎-聖地-湖西伽倻山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
집필자 | 정재윤 |
[정의]
내포 불교의 중심지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 예산군 덕산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갯가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을 ‘개산’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개산은 그 지역의 해상 교통, 즉 항해와 관련하여 지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대에는 해안선을 따라 높은 산과 같은 지표를 확인해 가며 항로를 잡는 연근해 항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바로 그때에 개산이 중요한 지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후 항해가 발전하고 새로운 직항로가 개발되었지만, 여전히 개산은 선원들에게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개산이 위치한 지역은 해상 교통이 매우 발달하고 교통의 중심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외국의 선진 문물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기도 했다. 고대에는 불교문화 같은 선진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되었다. 그 결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석가모니가 깨달음[大覺]을 얻은 곳, 즉 붓다가야 근처에 있던 가야산의 이름을 빌려 우리나라의 개산들 역시 불교식으로 가야산으로 표기되기에 이르렀다. 서산의 개산이 가야산으로 불리게 된 것 역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현재에는 북쪽 봉우리들을 상왕산(象王山)[‘가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를 뜻함]으로, 남쪽 봉우리들은 가야산으로 부르지만, 고려 시대까지는 모두 가야산으로 불렀다. 충청남도 서산의 너른 들판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667m의 가야산은 서산 어느 곳에서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상남도 합천의 가야산이나 전라남도 나주의 가야산 역시 서산의 가야산과 마찬가지로 해안가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장 높은 산이다.
[가야산, 내포를 품다]
조선 시대의 인문 지리지인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서산·해미·태안·면천·당진·홍주·덕산·예산·신창 등 가야산이 품고 있는 앞뒤 10고을을 내포(內浦)라 하였다. 이는 단순히 충청도 서북부라는 공간적 범위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야산과 그 주변, 서해안으로부터 깊숙이 만입된 포구가 존재하는 독특한 역사·문화적 전통을 갖춘 지역을 말한다. 내포 지역은 육로가 불편한 대신 많은 포구가 형성되어 수로가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예로부터 선진 문물의 창구가 되었다. 내포 지역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선진성과 개방성, 풍요라는 특성을 갖고 있어 불교문화의 수용과 발전에도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앞서 명칭이 붙게 된 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가야산은 시초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때문에 내포 지역의 불교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고, 실제로 가야산 줄기의 여러 마을에서부터 깊은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상과 사찰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즉, 내포 지역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가야산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내포’라는 용어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정착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산과 서산 지역의 독특한 지형, 서산 지역민의 문화적 특성 등을 시기에 관계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가야산에 터를 잡은 백제의 삼존불]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으로부터 도래한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제 불교가 꽃핀 시기는 475년 한성 함락 이후 웅진·사비 지역으로 천도를 하면서부터이다. 서산 지역과 가야산 일대 역시 이때부터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성기 백제의 주요 교통로였던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면서 이전 시기 한강을 중심으로 하던 해외 교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했고, 한성기의 항로와 가장 유사한 경로가 바로 태안반도의 서산 지역으로부터 덕물도를 거쳐 북서진하는 것이었다. 서산 지역에 속한 내포의 여러 고을은 중국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기착지이자 백제로 들어오는 첫 관문 역할을 하였다. 서산에 도착한 선진 문물은 육로를 통해 당시 도읍이었던 웅진·사비 지역으로 전해졌다. 태안반도의 동부 지역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가야산은 육로 교통의 장애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가야산 협곡의 교통로는 선진 문물이 전해지는 문화의 고속도로이기도 했다.
백제의 불교는 웅진 시대 무령왕 재위 무렵 꽃피기 시작하여 사비 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하였다. 삼국 시대 불교는 사상 이전에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이용되었는데, 백제의 불교가 웅진 말 사비 시대에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데서 연유한다. 이 시기 백제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통한 왕권과 왕실의 신성성 강화와 불법을 통한 호국을 강조하였다. 백제의 왕은 불법의 수호자로 백성들에게는 부처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인 동시에 그들을 이상 세계로 이끌어줄 구원자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에서는 왕실의 주도하에 대규모 사찰이 창건되고 사리 신앙이 유행하였으며, 불경의 번역 사업 등이 이루어졌다.
국가의 주도로 불교가 장려되었기에 삼국 시대의 불교 관련 유적은 일반적으로 도읍 일대에 위치하였다. 백제도 다르지 않아 기록이나 조사를 통해 알려진 불교 유적은 도읍지였던 공주·부여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반대로 도읍지 이외의 여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불교 유물·유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왕도 지역을 제외하고 백제의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가야산과 그 주변 고을, 즉 내포 지역은 매우 특수한 장소일 수밖에 없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서산 보원사지, 태안 마애삼존불상, 보령 성주사지,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등은 가야산과 그 인근에 세워진 백제의 불교 유적이다. 더구나 마애불의 경우에는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부여 지역에서도 알려진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마애불은 내포 지역의 선진성과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고대의 항해는 날씨, 파도, 바람 등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 위험한 일이었다. 백제인들 역시 안전한 항해라는 것은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원거리로 뱃길을 떠날 때면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 등의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전라북도 부안의 죽막동 제사 유적은 바로 바닷가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백제인의 흔적 중 하나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배 위에서 바라보이는 가장 높은 산인 가야산은 뱃길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물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토록 신성한 산은 다시금 육로를 통해 왕도로 가는 유일한 길을 제공하였다. 서산 지역의 뱃사람들은 수도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이 신성한 산에 부처를 모셔두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에 사찰을 세우고 당대 중국에서 유행하던 석굴 사원의 한 형식인 마애불을 조성하여 세세토록 바다가 평온하고, 많은 이윤을 얻길 빌었다고 여겨진다. 백제 중앙으로서도 이는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세 명의 부처가 가야산에 자리 잡은 것은 이때부터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더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는 고구려와의 대결에서의 힘의 열세를 중국과의 외교전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백제의 해상 활동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백제 왕실에서도 마애불을 조성하거나 가야산 자락에 불사를 창건하여 해상 활동을 지원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중국에까지 알려진 백제의 고승 혜현(慧顯)은 가야산 자락의 수덕사에서 활동한 사실을 전하며,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역시 가야산 동쪽 자락에 조성되어 호국의 의지와 전륜성왕의 대리인인 백제 왕의 사방으로 국력을 팽창하고자 했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가야산과 그 주변의 많은 불교 유적은 서산 지역의 선진성과 개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바다를 무대로 생활했던 서산 지역 백제인들의 소망과 애환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인국사 탄문이 잠든 곳]
가야산에 불교가 처음 시작되었던 백제 시대가 지고, 통일신라 시대가 도래하였다. 여전히 서산 지역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백제 시대보다 더 먼 변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위상이 조금 달라졌다. 신라 중대에는 화엄 사상과 계율학의 황금기가 도래하였지만 화엄 사상 같은 고급 교학과 한문은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왕실과 중앙 귀족의 전유물로 전락하였다. 민중들이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신라 하대에 이르러 지방 각지의 호족(豪族) 세력과 지방의 군벌 세력이 성장하는 가운데 화엄 사상의 반성을 위해 선을 중요시한 승려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른바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탄생하게 된다. 내포 지역에서는 성주사를 중심으로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의 성주산문(聖住山門)이 크게 일어났다. 한편, 보조국사 체징(體澄)은 가야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당나라에 유학한 후 다시 돌아와 가지산문을 개창할 정도로 가야산과 내포 지역에는 선종이 유행하였다.
신라 말 내포 지역의 불교가 다시 융성해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이 지역은 통일 신라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호족의 대표적인 근거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시의 웅천 지역[현재의 보령]의 호족이었던 김양은 무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양은 조부 때까지 진골이었으나 아버지 때부터 6두품으로 신분이 하강한 무염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인 모순에 직면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부성군태수를 지낸 신라 당대의 석학인 6두품 출신의 최치원(崔致遠) 역시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를 세울 정도로 서산 지역 내포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두 번째로 내포 지역은 백제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으로, 그 전통적 기반이 충실하였다는 점이다. 신라 말 각지의 세력들이 고구려·백제를 칭하며 일어났던 것은 통일 신라의 통일 후 삼국인들에 대한 통합 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지역에는 백제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또한 백제의 우수한 불교가 꽃을 피웠던 지역으로, 이미 다수의 불교 유적과 사찰 등 선종의 중흥을 위한 기반 시설 또한 충실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려의 건국과 함께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의 불교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서남 해안 호족 세력이 태조 왕건(王建)과 뜻을 같이하면서 서산·당진 등 내포 지역의 호족 세력 역시 고려 왕실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왕건이 중국을 유학하는 도승들을 지원하면서 귀국한 승려들이 고려 왕실과 각지의 호족을 연계하는 역할을 주도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이다. 가야산 보원사에서 입적한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은 태조의 왕후 유씨가 광종을 임신하자 그에게 기도를 요청할 만큼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실제로 광종이 왕위에 오르자 국사의 지위를 받았다. 서산 보원사지에 남아 있는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에 탄문이 늙어 보원사로 돌아올 때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데 “…… 스님의 일행(一行)이 가야산사(迦耶山寺)에 당도하니, 그 절의 스님들이 부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선악(仙樂)을 갖추었다. 이 때 번개(幡盖)[양산 혹은 일산]가 구름처럼 날리고 바라[鉢螺][불교의 악기인 나발과 소라]가 우레와 같이 진동하였다. 선교승(禪敎僧) 1,000여 명이 영접하여 절로 들어갔다. ……”고 하여 당시의 탄문과 보원사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신라 말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와 함께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내포 지역의 선종을 바탕으로 한 불교는 고려 개국 후에는 고려 왕실의 비호 아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신라 말의 선종의 정착과 고려의 삼국 통일에 기여하고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내포 불교의 힘은 정치적인 배경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산 지역의 선진성과 개방성이 고려 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까닭이라는 데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 가야산 일대에서 꽃피웠던 불교 유적인 서산 보원사지, 예산 수덕사 등을 비롯한 각종 불교 문화재는 당시에 화려했던 내포 불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미륵의 용화 세계가 펼쳐질 그곳, 가야산]
전성기를 누리던 내포 지역의 불교는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 사찰의 소실로 고려 전기의 화려함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내포 지역이 가진 개방성과 풍요는 선진 문물의 수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해상을 통한 왜적의 침입이 극심하였던 점은 그 개방성의 양면을 보여준다. 왜구의 침입뿐만 아니라 자연 재해, 질병에 따른 고려 말의 혼란은 서산 지역 민중들 사이에 미륵 신앙(彌勒信仰)이 성행하게 하였다. 이 지역의 민초들은 공동으로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불에 공양할 침향을 땅에 묻어두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용화 세계로 이끌어줄 미륵을 기다렸다. 가야산 주변의 고을에 세워진 해미매향비, 안국사지 매향암각, 덕산매향비 등은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다.
이와 함께 실질적으로 용화 세계를 이끌어줄 미륵불의 형상을 새겨 가야산과 그 인근에 조성하였다. 운산 용현리 미륵불상, 운산 미평리 미륵불상, 해미 반양리 미륵불상, 해미 조산리 미륵불상, 해미 황락리 미륵불상, 해미 산수리 미륵불상, 해미 대곡리 미륵불상, 덕산 상동리 미륵불상, 덕산 신평리 미륵불상, 고덕 석곡리 미륵불상, 덕산 상기리 미륵불상 등 많은 불상은 당시 이 지역에 미륵 신앙이 얼마나 성행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바로 가야산은 56억 7000만 년이라는 먼 미래에 하생·성불하여 민중들을 구제할 희망불이 용화 세계, 즉 이상 세계를 만들어낼 곳이었던 것이다.
조선이 개국한 후에 내포 지역의 불사는 점차 쇠퇴하고 민간 신앙으로서 민중의 종교로 자리하였다. 억불 숭유에 따른 탄압 및 왕실과 중앙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자 대규모 사찰을 유지할 수 없었다.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동안 가야산을 위시한 내포 지역의 사찰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찰 역시 10여 칸이 되지 않는 소규모인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점은 운영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다만 등촉계(燈燭契)가 만들어진 개심사(開心寺), 추사 김정희(金正喜) 집안에서 중건한 화암사, 고종과 대원군의 지원으로 창건된 보덕사 같은 몇몇 사찰의 경우에는 외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번창할 수 있었다.
내포 불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에 이르러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 경허(鏡虛), 일제 강점기에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함께 일본 불교화에 강하게 맞선 만공(滿空) 월면(月面) 등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함으로써 내포 불교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