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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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弘郁神道碑-墓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654년 9월 20일 - 임시 안장[대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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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건립 시기/일시 | 1772년 - 신도비 건립 |
이전 시기/일시 | 1655년 11월 16일 - 현 위치인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로 이장 |
현 소재지 | 김홍욱 신도비와 묘역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 |
성격 | 신도비|묘역 |
양식 |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신도비 보호각] |
관련 인물 | 김홍욱(金弘郁)|이후원(李厚源)|김적(金積)|송시열(宋時烈)|김세진(金世珍)|이재(李縡)|윤득화(尹得和)|유척기(兪拓基)|김구주(金龜柱)|김한록(金漢祿)|박필주(朴弼周) |
크기(높이,길이,둘레) | 221㎝[신도비 높이]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인 김홍욱(金弘郁)의 신도비와 묘역.
[건립 경위]
김홍욱(金弘郁)[1602~1654]은 1654년(효종 5) 7월 효종에게 응지상소(應旨上疏)[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이 직접 구언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완남군 이후원(李厚源)[1598~1660]에게 편지를 보내 “부모님 곁에 묻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인조 때 사사된 민회빈 강씨와 유배되어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어서 심한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원은 김홍욱의 유명에 따라 장례를 주관하였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김홍욱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도 화가 두려워 조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장례를 마친 후 그해 9월 20일 김홍욱의 고향 대교리(大橋里)에 임시로 묘를 썼고, 이듬해인 1655년(효종 6) 11월 16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족보에 기록된 「묵수지침임지원(墨水池枕壬之原)」이 바로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먹수지]인데 아버지 김적(金積)의 산소 옆이다. 그 후 118년이 지난 1772년(영조 48)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로, 1674년(현종 15) 김홍욱의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이 유배 중이던 송시열을 직접 찾아가 받은 것이다.
또한 이재(李縡)가 신도비명 후기(後記)를 찬한 것을 계기로 윤득화(尹得和)가 본문을 쓰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써 각자까지 이루어졌으나 건립에 이르지는 못하다가, 1772년 5세손 김구주(金龜柱) 등의 주선에 힘입어 비로소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다. 이 때 현손 김한록(金漢祿)이 찬한 신도비명 추기(追記)가 첨각되었다. 묘비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학주공파와 성암서원(聖巖書院)의 협조로 1995년에 새로 조성하였으며, 묘비명은 1746년(영조 22) 박필주(朴弼周)가 지은 것이다.
[위치]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 명지동에서 먹수지 방향의 비포장 소로로 2.5㎞ 정도 들어가면 먹수지마을에 도착하는데, 김홍욱의 신도비와 묘역은 마을 뒤편 옥녀봉 아래 산사면에 위치한다.
[형태]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석 대좌(臺座) 위에 오석(烏石)을 세웠으며, 전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221㎝, 너비 88㎝, 두께 43㎝이다. 신도비의 보호각은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二翼工)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 신도비에서 150m 지점에 묘역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동자석·망주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김홍욱의 신도비와 묘소는 서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묘소는 부인 동복 오씨(同福吳氏)와 쌍분이다. 묘역의 석물 중 망주석과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에 새로 만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홍욱은 경주 김씨 학주공파의 중시조이다. 김홍욱의 집안에서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신도비의 건립 과정은 당시의 정치적 동향과 연계되어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