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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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川洞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예천동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훈 |
조성|건립 시기/일시 | 고려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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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3월 2일 - 충청남도역사문화원[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발굴 조사[3만 4700㎡]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7월 26일 - 충청남도역사문화원[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발굴 조사[3만 4700㎡] 완료 |
현 소재지 | 예천동 유적 - 충청남도 서산시 예천동|읍내동 |
원소재지 | 예천동 유적 - 충청남도 서산시 예천동|읍내동 |
출토 유물 소장처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충청남도 공주시 금흥동 110-2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공주박물관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360 |
성격 | 생활 유적|생산 유적 |
면적 | 67,454㎡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예천동·읍내동에 있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생활·생산 유적.
[개설]
예천동 유적(禮川洞遺蹟)은 서산시 예천동과 읍내동 일원의 도시 개발 구역 예정 부지에 대한 문화 유적 발굴 조사[조사 면적 6만 7454㎡]를 통해 확인되었다. 도시 개발 예정 부지에 대한 지표 조사[33만 7970㎡]는 2004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공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으며, 충청남도역사문화원[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2004년 1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시굴 조사[9만 9000㎡]와 2006년 3월 2일부터 동년 7월 26일까지 발굴 조사[3만 4700㎡]를 실시하였다.
Ⅰ·Ⅱ 지역으로 구분하여 발굴 조사한 결과, Ⅰ 지역에서 조선 시대 수혈 주거지 10기와 수혈 유구 1기·토광묘 131기·회곽묘 3기가 조사되었으며, Ⅱ 지역에서는 고려 시대 건물 터 5동·기와 가마 4기·소성 유구 2기와 조선 시대 수혈 주거지 14기·수혈 유구 4기·시대 미상의 토광묘 40기가 확인되었다.
[위치]
예천동 유적은 충청남도의 서북단 반도부인 서산시에 위치하는데, 행정 구역상 예천동과 읍내동 일원에 해당한다. 지방도 29호선을 따라 예천사거리에서 4시 방향으로 직진하면 왼쪽에 예천동 유적이 나타난다. 예천동 유적 뒤편으로는 중앙호수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형태]
발굴 조사 결과 고려 시대 건물 터는 Ⅱ 지역의 북쪽과 남쪽, 중간 지점에서 3개의 그룹을 이루며 확인되었다. 북쪽에 위치한 2·3호 건물 터와 중앙부의 1호 건물 터, 남쪽의 4·5호 건물 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각각의 성격 또한 구분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기와 가마는 모두 Ⅱ 지역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중 4기의 가마는 대체로 동일 능선 상에 분포하고 있으며, 4·5호 건물 터의 배수로에 의해 훼손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1호와 4호, 2호와 3호가 유사한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유구 중 수혈 주거지는 모두 24기로 Ⅰ 지역에서 10기, Ⅱ 지역에서 14기가 확인되었다. 분묘 유구는 Ⅰ 지역에서 134기, Ⅱ 지역에서 40기가 확인되었다. 무덤의 형태는 3기의 회곽묘를 제외하고 모두 토광묘이며, 일단광식과 이단광식 두 종류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Ⅰ 지역은 남사면 전체에, Ⅱ 지역은 동남쪽 사면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토광묘의 장축은 모두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게 조영되었다. 출토 유물이 없어 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에서 현대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생활 유구와 생산 유구,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생활 유구에서는 어골문(魚骨文)과 복합문 평기, 화형 청자(花形靑磁), 상감 청자(象嵌靑瓷), 자기편,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고, 생산 유구에서는 연질(軟質) 기와가 확인되었다.
기와 가마의 경우 소성실 내부에서 확인된 유물의 종류가 구분되는데, 먼저 2·3호 기와 가마 출토 기와에는 중앙에 사격자문(斜格子文)을 배치하고 상단과 하단에 대칭되는 어골문을 시문하였다.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모두 출토되고 있다. 2·3호 가마에서 출토되는 평기와 측면 분할 기법을 살펴보면 분할 흔적이 안쪽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교차 분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평기와 제작 기법은 대체로 9세기에 활용되는 제작 기법으로, 나말 여초에 해당하는 시기에 조성되어 기와를 생산하던 유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4호 기와 가마는 모두 무문(無文) 기와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각각의 유구 최하위 토층에서 확인되는 유물은 모두 무문 기와로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고 있으며, 측면의 분할 기법은 내측 분할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기와 상단의 깎기조정한 흔적이 일정하게 확인되고 있어 고려 초기에 활용된 동일 시기의 유구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들은 공주시 금흥동 110-2번지에 위치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공주시 웅진동 360번지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예천동 유적은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의 생활과 생산, 분묘 유적들이 대단위로 확인되어 인근에서 확인된 잠홍동 유적(潛紅洞遺蹟)과 더불어 당시 서산 지역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 수혈 주거지는 주변에 조선 시대 분묘가 대다수가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무덤과 관련된 시묘 시설일 가능성이 있으며, 기와 가마가 확인되어 기와를 만드는 와공들의 거주 지역, 바닷가와 인접하여 경제생활을 하는 집단의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